2025년 1월호 Vol. 414 음악의 자리맺다 / 괴짜의 역사를 찾아서 |
---|
페이스북 트위터 URL공유 |
인트로의 탄생 음악의 자리 바야흐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시기다. 2025년의 단가·서곡·인트로는 무엇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단도직입’이란 말이 있다. 단검 들고 바로 쳐들어 간다는 이야기. 예술은, 음악은 보통 그러지 않는다. 더욱이 무대예술이라면…. 도시나 고을의 여기저기서 모여든 청중의 어수선한 착석이 끝나고, 암전이 된다거나 “자, 자, 자, 이제부터…” 하는 사회자의 바람잡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 현실의 찬물을 잠시 차단하고 여기서만 작동하는 연막의 환상이 펼쳐질 것이며 세상사를 잊고 몰입할 시간이라는, 입수 전 준비 운동과 같은 통과의례다. 우리네 판소리에 본격적인 스토리로 들어가기 전 목을 가다듬는 짧은 노래 단가(短歌)가 있다면, 서구의 오페라에는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연주 버전 티저(Teaser) 격인 서곡(序曲·Overture)이 있다. 판소리의 단가에는 여러 기능이 있다. 소리꾼으로서는 목을 풀 수 있고, 고수 입장에선 오늘의 소리꾼과 호흡 및 합을 미리 맞춰 볼 수 있다. 지휘자도, 메트로놈도 없는 장편 ‘밀당’의 끝판왕이 바로 판소리 아닌가. 디테일 저는(‘절다’의 활용형) 본공연인 판소리에 앞서 단가는 내용적으로도 인생무상이나 풍류, 효도 따위의 주제를 은유적으로 풀어내는 식이다. 백발가·사철가·만고강산 등이 유명한데, “어화세상 벗님네야~” 식의 인트로부터 좌중의 이목을 확 사로잡게 마련이다. 오페라 <카르멘> 포스터(Rosabel Morrison in Carmen, 1896) 서구 클래식에서 서곡은 어원부터 잘 살펴야 한다. ‘Overture’에 ‘Over’가 있기에 ‘Game Over’처럼 끝나는 느낌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원이 프랑스어 ‘Ouverture’에서 왔다. 불어의 ‘열다(Ouvrir)’ 동사가 뿌리다. 1650년대에 이탈리아 출신 프랑스 작곡가 장 바티스트 륄리가 오페라나 발레곡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으로 발명했다. 그가 섬기던 태양왕 루이 14세의 기품을 청각적으로 표현하려 했다. 왕과 왕족에서 대중으로 청중이 넓어지면서 서곡의 기능과 형태는 진화했다. 지금이야 클래식 공연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모두들 조심스러워지지만 19세기만 해도 음악회장은 군중이 실내에 밀집하는 드문 이벤트였기에 공연 시작 시간까지도 대단히 소란스러웠다고 한다. 그래서 서곡이 발달했다고.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서곡,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 비제의 ‘카르멘’ 서곡. 그렇다면 현대의 팝, 록 콘서트에는? ‘시작 전 음악’이란 게 있다. 이것은 고도의 확성 장치가 발달한 20세기에 시작된 의식이다. 오늘의 주인공이 무대에 오르기 전, 기다리는 관객들 심심할까 봐 트는 음악이다. 미리 힘 다 빼면 안 되니 본공연 때 음량의 30~50% 정도로 재생하는 게 핵심이다. 템포나 분위기도 본 공연을 압도하면 안 된다. 이를테면 오늘 공연이 메탈리카인데 ‘캐니벌 콥스’ 같은 더 센 데스메탈 밴드 음악을 풀 볼륨으로 틀어 두면 곤란하단 얘기다. ‘시작 전 음악’은 PA(Public Address) 시스템이 자리 잡은 이래 쭉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각종 인터넷 게시판을 보다 보면 “내가 1960년대에 그레이트풀 데드(미국 록 밴드) 콘서트에 몸소 갔었는데, 그때 시작하기 전에 이런 음악이 나왔다”는, 음악 아재·아지매의 목격담을 접하게 된다. 헤비메탈 밴드 메탈리카(Metallica) 앞에 잠깐 얘기한 메탈리카야말로 이 ‘시작 전 음악’을 가장 예술적으로 활용한 선례로 꼽을 만하다. 더구나 이건 ‘직관’했으니 확실하다. 공연이 시작되기 거의 1시간 전부터 아이언 메이든이나 딥 퍼플 같은 전 세대의 하드 록, 헤비메탈을 ‘잔잔하게’ 깔아 두던 메탈리카는 진짜 시작되기 직전, 반드시 이 곡을 튼다. ‘L'estasi Dell'oro’. 영어 제목은 ‘The Ecstasy Of Gold’다. ‘시도라미시도라미시도라미시도라미…’ 16분 음표로 잔물결처럼 긴박히 출렁이는 단조의 피아노 분산화음. 그 위로 거인의 발걸음처럼 성큼성큼 큰 음폭을 가로지르는 ‘라-미-솔-미’의 주선율…. 그리고 운명의 종막(終幕)에 다다름을 알리는 듯한 종소리까지….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1966년 영화 <석양에 돌아오다- 속 석양의 무법자>의 테마로 쓰인 곡. 이 음악을 들으면 반사적으로 석양이 떠오른다.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김광균 ‘외인촌’ 중) 같은 공감각적 심상 같은 건데, 이 석양은 그러나 충남 태안의 안면도나 경기 화성의 제부도쯤에 걸린 그것이 아니다. 뉴멕시코주의 석양 아래 세 남자가 서로 총을 겨눈 ‘멕시칸 스탠드오프(Mexican Stand-Off) 같은 정경 정도는 돼 줘야 걸맞은 BGM이다. 영화 <석양에 돌아오다- 속 석양의 무법자> 포스터 저 ‘The Ecstasy Of Gold’, 즉 금빛 황홀경이 울려 퍼지기 시작하면 객석의 온도는 순식간에 비등점으로 치닫는다. 이탈리아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 1928~2020)의 이 선율에 로마 콜로세움을 방불케 하는 함성이 겹쳐 노도(怒濤)가 될 때 오늘의 주인공이 하나하나 무대 위로 그 실루엣을 드러내는 것이다. 라스 울리히(드럼), 로버트 트루히요(베이스기타), 커크 해밋(기타), 그리고 제임스 헷필드(보컬, 기타)까지…. 이것은 WWF(지금의 WWE)를 장식한 미국 프로레슬러가 링 오르는 장면에 맞먹는 허세요 허례허식이며, 사실은 본게임을 능가하는 격정의 진경(眞境)인 것이다. 메탈리카는 2007년 셀린 디옹부터 퀸시 존스까지 참여한 모리코네 헌정 앨범 「We All Love Ennio Morricone」에서 당당히 ‘The Ecstasy Of Gold’를 맡아 재해석하기도 했다. 2020년 7월, 모리코네가 별세했을 때 제임스 헷필드는 추모사를 SNS에 공개하며 “1983년 우리 투어 때 처음 이 곡을 틀었는데 그것은 말 그대로 마법이었다. 우리의 혈류, 우리의 심호흡, 우리의 주먹 인사, 우리의 기도이자 공연 전 의식이 됐다”고 털어놓으며 다음과 같이 글을 맺었다. 메탈리카의 <We All Love Ennio Morricone> 앨범 커버 “나는 당신을 영원히 메탈리카 패밀리의 일부로서 기억하겠다!” 디스코그래피에 대표작 ‘Californication’(1999년 7집)을 때려 박은, 미국 캘리포니아와 로스앤젤레스를 상징하는 밴드 ‘레드 핫 칠리 페퍼스’. 2024년 파리 올림픽 폐막식에서 차기 개최지 LA 대표로 이원 중계 공연을 펼친 그들은 콘서트 인트로에도 캘리포니아의 전통을 이식했다. 마치 캘리포니아 출신의 대선배이자 ‘잼 밴드(Jam Band, 긴 즉흥연주를 전매특허로 하는 밴드 음악 장르)’계의 대부인 ‘그레이트풀 데드’의 방식에 헌사라도 바치듯, 공연의 시작은 무조건 다짜고짜 드럼·베이스기타·기타의 긴 잼 연주로 하는 것이다. 세 멤버의 난상토론 같은 임프로비제이션(Improvisation)은 어느 순간 봉곳하게 ‘레-미-레-미-레-미’의 온음 반복 악절로 수렴하고, 그대로 폭발적 첫 곡 ‘Can’t Stop’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어지러운 즉흥연주를 쾌도난마로 자르며 자연스레 등장하는 저 첫 ‘레-미’부터 객석은 비등점으로 치닫는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공연에서 바로 이 순간은, 마치 방금 주문한 버블티의 첫 모금에서 쌉쌀한 밀크티에 이어 도톰한 진주알 같은 타피오카가 뭉클하게 혀끝으로 치고 들어올 때의 느낌에 맞먹는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i Peppers) 뉴멕시코주 멀리, 제부도 어디쯤으로 2025년의 마지막 석양이 질 때 우리는 어떻게 360여 일을 회고할 것인가.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다. 프로레슬링 스타일이든 스파게티 웨스턴 모드이든, 아니면 허튼가락으로든 첫걸음을 진지하게 떼어야 할 것이다. 음악과 함께라면 두려울 게 없다. 글. 임희윤 기자·평론가. 국악·대중음악·클래식·영화 음악을 두루 다룬다.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한국힙합어워즈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몸속에 꿈틀대는 바이킹과 도깨비를 느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