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호 Vol. 414 소통으로 잇는 삶이란 짝쇠맺다 / 예술가의 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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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무용단 정관영 소통으로 잇는 삶이란 짝쇠 우연성은 삶의 핵심이 아니다. 그러니까 인과율을 근거로 찾아낸 필연성이 인생의 뼈대가 된다. 국립무용단 정관영 단원의 삶이 그렇다. 스스로 ‘촌놈’이라 하는 그는 충남 대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소·개·닭·돼지와 함께 뛰어놀던 그의 어릴 적 꿈은 농사꾼이었다. “예술과 좀 멀리 있는 관계”였는데 농악을 접한 것이 시작이었다. “인생을 걸 수 있는 직업 전환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농악 공연을 다녔고 상쇠를 맡게 됐다. 그때 그의 발놀림이 범상치 않은 걸 눈치챈 관계자가 무용을 하라고 제안했다. 한국민속촌 농악단에 몸담기도 했던 정관영은 결국 대학 무용과에 합격하면서 무용의 길로 들어섰다. 국악 단체를 꾸려 국악경연대회에서 상을 받았는데, 무용 콩쿠르에서도 입상했다. 그러다 1999년 국립무용단에 입단했고 2024년에 25주년을 맞았다. 대학을 포함해 지역에만 있었던 정관영에게 서울 중심에 있는 국립무용단의 첫인상은 낯설었다. 추위가 본격화한 2024년 12월 초순에 국립극장에서 만난 그는 “그래서 돌파구를 찾고자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올곧은 자세로 말했다. 그 고민의 또 다른 시작점은 국립무용단 입단 동기였던 정유진이다. 2001년 결혼한 부부는 2년 뒤에 첫아이를 낳았고, 2004년 부부 공연의 닻을 올렸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긴 항해의 출발점이었다. 두 사람은 이후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공연 방법을 고민하다, 한 라디오 방송에서 백혈병 어린이를 돕자는 안내를 듣게 된다. 2006년부터 ‘정관영·정유진 춤’의 관람료 수익금과 관객의 기부금을 백혈병 어린이에게 전달한 이유다. 본업을 잘 감당하는 동시에 이 자선 공연도 6, 7회가량 펼쳤다. 지금까지 기부한 금액은 어림잡아도 5천만 원에 달한다. 자선 공연이라고 작품성을 얕잡아 보면 큰코다친다. 작품이 좋으니 관객이 몰리고 기부금도 만들 수 있다. 정관영이 예술관까지 반영해 만든 극이 <영원한 사랑-이터널 러브>다. 황진이·벽계수 이야기를 모티프 삼은 작품으로, 기생과 양반의 사랑 이야기다. 대본은 정관영이 직접 썼고 가창 실력도 좋은 정유진이 노래를 부른다. “무용이 주가 되지만, 대사도 있고 노래도 있고 2시간 동안 역동적으로 쉬지 않고 선보이는 작품이에요.” 정관영은 ‘착하게 살 거야’ 하는 마음을 부러 먹지 않았다. ‘아이를 돕는다’는 그 자체로 뿌듯했고 해당 시간은 이들 부부에게 행복이었다. 자녀에게 부모이자 어른의 역할을 제대로 보여 준 것 같다는 흐뭇함도 있다. 정관영은 쉰 살이 넘었지만 여전히 녹슬지 않은 기량을 과시하고 있다. 특히 농악의 피가 여전히 흐르고 있는 그는 “타악적인 리듬감이 일품”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모든 무용수가 무용단에 들어올 때 꾸는 꿈이 있다. 무대에 주역으로 서는 거다. 그런데 정관영은 그 꿈을 바로 접었다. “환경적인 몸과 실력이 다른 무용수들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시골 촌놈이 이 공간에서 이름을 남기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숙제를 안게 된 거죠.” 그래서 고민 끝에 만들어 낸 게 ‘소고춤’이다. 타악기 연주 실력도 탁월했던 만큼 그에겐 흥이 넘치는 안성맞춤의 춤이었다. 이 춤을 배정혜 전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이 눈여겨봤고 2010년 국립무용단 <코리아 환타지>에 포함했다. ‘한국무용계 신사’로 통하는 정관영이 2013년에 ‘국립예술가시리즈’로 선보인 <젠틀맨>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대표작이다. 남편·아빠·직장인으로 살아가는 남성들의 지난한 삶을 몸짓으로 풀어냈다. <젠틀맨>의 마지막 ‘젠틀맨의 수다’는 정관영의 모친 관련 실제 얘기다. 그래서 그는 이 작품에서 많이 울었다. “제 인생에서 제일 힘들었던 시기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때 였어요. 제가 무용하는 걸 한 번도 못 보셨거든요. 농악 공연 발표회 때도 아버지가 ‘이런 딴따라를 왜 하냐?’고 말씀하시며 반대하셨지만, 어느 순간엔 공연을 보신 뒤 ‘얘가 내 아들이여’라고 말씀하셨어요. 충청도 어른 특유의 특급 칭찬인 거죠. 그 시간이 제 머릿속에 제일 많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더 무용하는 모습도 보여 드렸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계속 남아요.” 국립무용단이 2025년 1월 선보이는 설 명절 기획 공연 <축제(祝·祭)> 3부에도 정관영이 안무한 춤이 들어간다. 소고춤, 무고(북을 이용한 춤)가 그것이다. 경기·충청 지역 농악에 바탕을 둔 꽹과리춤 ‘너설풀이’는 그가 가장 아끼는 안무작이지만 이번 공연엔 시간 관계상 포함되지 않았다. 이 춤을 완성하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꽹과리 소리가 익숙하지 않은 관객을 위해 합금 대신 나무로 꽹과리를 제작했다. 꽹과리 둘이 ‘짝’을 이뤄 소리를 주고받으며 서로 대화한다고 해서 붙여진 짝쇠를 모티프로 서사까지 부여한 춤이다. 이처럼 정관영의 춤엔 이야기가 있다. 무용이 중심이 되는데도 판소리 ‘춘향가’의 사랑가를 삽입하거나 대사도 친다. 그에게 장르의 한계는 의미가 없다. “무용수는 무용을 함으로써 관객하고 소통하잖아요. 그런데 무용은 마치 추상화 같아서 관객과의 그 소통이 쉽지가 않아요. 제가 찾은 건 뭐냐면요. 보다 쉽게 구체화할 수 있는 예술 장르를 더하는 거예요. 가령, 대사를 더해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게 됐어’ 한마디를 던지고 제가 몸을 움직이면 그 사랑이 무수히 많은 사랑으로 바뀌어 전달되죠. 예전에 <나는 가수다>라는 경연 프로그램에서 가수들이 4분, 5분 노래를 부르는 동안 모든 사람이 웃고 울고 박수 치고 환호하는 모습을 인상 깊게 봤어요. ‘노래야말로 종합예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제 움직임·행위에 어떤 가치를 부여해야 관객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설 수 있을까 방법을 찾기 시작했죠.” 국립무용단은 정관영에게 남다른 곳이다. 무용단 선후배들, 관련 스태프들이 없었으면 본인이 창작한 공연을 외부에서 선보일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6년 후 무용단에서 정년퇴임하면, 현역 무용수의 삶을 내려놓을 것이라는 정관영은 갈수록 ‘한국무용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고 했다. ‘저 나름대로 구축된 ‘한국무용 언어’가 있어요. 그런데 그 언어를 다른 이들이 ‘아, 한국무용이구나’ 받아들일 수 있을지에 대해선 확신이 없어요. 변화를 쫓아가는 게 맞는 건가, 아니면 원형을 지키는 게 맞는 건가. 제 마음속에서 이런 생각들이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정관영은 “당신에게 무용은 뭐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을 지금도 종종 받는다. 자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무용수라 이 질문이 너무 어렵다고 했다. 다만 무용수 관점이 아닌 관객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싶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좋은 공연이라는 판단은 제가 할 수가 없고, 관객이 할 수 있죠. 특히 전 관객의 박수 소리에 대한 고민을 정말 많이 한 사람이거든요. 예술가가 자신의 얘기만 하고 내려오는 공연이 너무 많아요. 그걸 보면서 관객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야 소통이 될까 생각하기 시작했죠. 지금은 그걸 어느 정도 찾은 것 같아요.” 무용수와 관객은 결국 사람과 사람이고 소통을 통해 그 인연을 더욱 단단히 만드는 게 정관영의 인과율이다. 그가 사람을 좋아하고 베푸는 걸 기꺼워하는 이유다. 정관영은 그렇게 삶의 짝쇠들을 지금도 찾아 나선다. 글. 이재훈 『뉴시스』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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