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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호 Vol. 414

국악으로 확장된 게임 음악의 세계

달다 / 다시보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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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관현악단 <음악 오디세이: 천하제일상>
국악으로 확장된 게임 음악의 세계

국악계에서도 뒤늦게 게임과 게임 음악에 대한 시대적 패러다임을 깨달았다.
국악은 MZ세대와 소통할 수 있을까.




2024년 11월 29~3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린 <음악 오디세이: 천하제일상>은 미디어아트, 로봇 지휘자, VR(가상현실) 등 다양한 시도를 통해 국악관현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새롭게 시도하는 관현악시리즈의 일환이다. 이번에는 동시대 관객과 소통하기 위해 창작 영역을 게임 음악으로 확장했다. 그리고 결과는 국악이 게임과 잘 어울릴 뿐만 아니라 게임 음악을 매개로 젊은 층에게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게임 음악의 가능성

<음악 오디세이: 천하제일상>은 국립국악관현악단과 국내 최초 경제 전략 MMORPG(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인 ‘천하제일상 거상’의 협업으로 마련됐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천하제일상 거상’의 OST를 단순히 국악으로 편곡해 연주한 것이 아니라 작곡가들에게 게임 속 주요 선율을 활용해 새로운 곡을 만들도록 의뢰했다. 그리고 ‘서바이벌 예능’처럼 현장에서 관객의 투표로 우승 작곡가를 선정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이 2021년부터 소년소녀를 위한 <소소 음악회>에서 모바일 게임 ‘쿠키런: 킹덤’ ‘크레이지레이싱 카트라이더’의 BGM을 국악으로 들려준 데서 한발 더 나아간 셈이다. 
2002년 출시된 ‘천하제일상 거상’은 16세기 아시아를 배경으로 무역과 전투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최고의 상인이 되는 과정을 다룬 게임이다. 2000년대 초반에 등장한 게임이다 보니 OST가 당시 게임 음악 트렌드인 신시사이저 중심의 경쾌한 전자음악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게임에 나오는 조선·중국·일본 등 아시아 국가에 맞춰 동양풍 느낌을 자아낸다.
김유원이 지휘한 이번 공연은 우선 ‘천하제일상 거상’ 접속을 위해 로그인할 때 나오는 1분 정도의 배경음악을 약 6분 길이의 국악관현악으로 재탄생시킨 손다혜 작곡가의 국악관현악을 위한 ‘새로운 세계’로 시작됐다. 손 작곡가는 국악관현악·창극·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주목받고 있다. 원곡의 익숙한 선율을 토대로 기승전결 구조부터 강약 조절까지 ‘새로운 세계’는 하나의 잘 짜인 이야기처럼 관객을 몰입시켰다.  




다섯 필드를 품은 관현악

이어 경쟁 부문으로 게임 속 일본·인도·대만·중국·조선의 다섯 필드를 배정받은 작곡가 5명이 필드의 주요 선율을 활용해 만든 곡이 연주됐다. 일본 필드의 장태평은 ‘파랑 파랑’, 인도 필드의 홍민웅은 ‘신화의 숨결’, 대만 필드의 정혁은 ‘절벽의 섬(The Cliffed Isle)’, 중국 필드의 성찬경은 ‘사랑에 빠진 차우차우’, 조선 필드의 강한뫼는 ‘안녕(安寧)’을 각각 작곡했다. 
이번에 참여한 작곡가들은 국악만이 아니라 다른 장르에서도 러브콜을 받는 등 다양한 창작 활동을 해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각 필드의 주요 선율을 토대로 게임의 서사와 캐릭터 등에서 모티프를 얻은 곡을 선보였다. ‘파랑 파랑’은 일본 전통 음계와 리듬, 고토와 샤미센 등 전통악기를 연상케 하는 편곡이 돋보였고, 인도 신화 속 신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신화의 숨결’은 다양한 리듬과 화음을 통해 신비로운 느낌을 줬다. 이어 ‘절벽의 섬’은 서정적 멜로디와 점진적으로 고조되는 분위기로 웅장함을 표현했으며, ‘사랑에 빠진 차우차우’는 화려한 중국의 전통 멜로디와 한국의 따뜻한 남도민요의 조화 속에 개 소리를 타악기로 구현해 유쾌함을 더했다. 마지막으로 ‘안녕’은 원래 국악의 요소가 강한 곡인 만큼 이번에 기존 분위기는 유지하되 새로운 장단과 콘셉트를 더했다. 
다섯 작곡가의 경쟁 끝에 29일에는 인도 필드를 표현한 홍민웅, 30일에는 중국 필드를 표현한 성찬경이 각각 관객의 선택을 받았다.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멜로디가 돋보인 두 작품이 관객에게 더욱 매혹적으로 들린 듯하다. 또한, 이번 공연이 열린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로비에는 ‘천하제일상 거상’의 캐릭터와 세계관을 담은 전시물이 설치돼 MZ세대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나아가 게임회사 ㈜에이케이인터렉티브는 이번 공연을 위해 만들어진 곡을 앞으로 ‘천하제일상 거상’의 버전업에 맞춰 활용할 계획이어서 게임과 게임 음악 콘서트 사이의 특별한 시너지도 기대된다.




게임 그리고 예술

이번 공연은 한국에서 높아진 게임의 위상과 함께 게임 음악의 인기를 실감하게 했다. 사실 K-팝, K-드라마, K-웹툰 등이 해외에서 인기를 얻고 있지만 K-게임에 비하면 높지 않다. 2023년 K-콘텐츠 수출액 53억8,698만 달러 가운데 게임은 64%인 34억4,600만 달러나 된다. 그리고 이런 게임과 게이머 사이의 정서적 유대감을 만들어 주는 주요소 가운데 하나가 바로 게임 음악이다. 영화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영화 음악과 비슷하지만, 그 시장규모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게 다르다. 또한, 게임이 플랫폼 다양화·시즌·버전업 등에 따라 계속 변화한다는 점에서 게임 음악의 확장성은 매우 크다.
게임은 오랫동안 불건전한 놀이로 인식됐지만, 게임 산업의 발전과 사회의 인식 변화에 따라 점차 예술로 인정받게 됐다. 2000년대 이후 일본·프랑스·미국 등에서 게임이 예술에 포함되는 조치가 이뤄진 데 이어 한국에서도 2022년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으로 대중 문화예술에 포함됐다. 게임이 예술로 인정받게 된 배경으로 게임계 밖에서 먼저 인정받은 게임 음악의 인기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게임 음악은 이제 영화 음악이 갔던 길을 따라가는 모습이다.
사실 영화도 처음엔 단순한 볼거리 정도로 받아들여지다 점차 예술로 인정받게 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따라 영화 음악의 위상도 높아지면서 이제는 클래식계에서 영화 음악 콘서트가 자주 열리고 있다. 전 세계 클래식계 오케스트라의 양대 산맥인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지난 2020년과 2021년 나란히 <E.T> <죠스> <쥬라기 공원> <스타워즈> <인디애나 존스> <해리 포터> 등 150편 넘는 영화의 OST를 작곡한 존 윌리엄스를 초청해 지휘까지 맡긴 것은 영화 음악이 고전의 반열에 올랐음을 보여 주는 사례다. 한국에서도 최근 공연예술전산망 자료에 따르면 2024년 3분기 국내 클래식 분야 티켓 판매액 상위 20위 가운데 영화 음악 콘서트가 무려 8개였다. 




게임에 대한 몰입감을 높여 주고 독특한 세계관을 창출하는 게임 음악도 영화 음악 못지않다. 완성도 높은 게임 음악을 위해 게임 제작사가 저명한 작곡가와 유명 가수 및 대형 오케스트라 등을 투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주류 공연계에서 게임 음악의 가치에 눈뜬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게임이나 게임 음악을 예술로 보지 않았던 만큼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2010년대 말부터 국내 여러 공연장과 오케스트라가 잇따라 게임 음악 콘서트를 열고 있다. 게임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MZ세대가 공연장에 몰려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게임 음악을 국악으로 편곡해 연주하는 콘서트는 성남시립국악단이 2017년부터 거의 매년 성남시 주최 행사에서 무료로 열고 있다. 다만 이는 한국의 주요 게임 회사들이 성남 판교에 입주해 있는 것과 관련 있다. 그래서 2024년 들어 지난 5월 국립국악원이 실력파 뮤지션과 함께 게임 음악을 국악으로 편곡한 싱글 음반 13장을 내놓고, 12월에 「국립국악원 게임 사운드 시리즈」를 추가로 3장을 발매한 데에 이어,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음악 오디세이: 천하제일상>에서 작곡가에게 의뢰한 작품을 연주한 것은, 국악계와 게임 음악의 만남이 본격화하는 신호로 보인다. 이와 함께 어린 시절부터 게임이 생활화된 MZ세대에게 친숙한 게임 음악을 국악으로 들려줌으로써 한층 가깝게 다가서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읽힌다.


글. 장지영 『국민일보』 선임기자, 공연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