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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호 Vol. 413

젠더라는 이름의 경계 앞에서

맺다 / 괴짜의 역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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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크로스의 탄생

젠더라는 이름의 경계 앞에서

사회는 온갖 경계로 가득하리라. ‘에덴의 불칼’만큼이나 촘촘한 그 경계들을
우린 때로 예술의 날개를 입고서야 사뿐 뛰어넘는다. 창작자와 소비자의 가슴에
‘내가 지금 예술을 하고(보고) 있다’는 효능감을 벅차게 안기면서.


ⓒ국립극단



최근 드라마 <정년이>가 큰 화제를 모았다. 국극이란 독특한 소재부터 주연 김태리를 비롯한 배우들의 열연과 열창까지 고루 주목받았다. <정년이>의 원작은 웹툰이다. 이 작품은 지난해 국립창극단이 이를 무대에 올리면서 이미 한차례 장르나 플랫폼의 경계를 넘은 ‘크로스 콘텐츠’로서 그 가능성을 십분 확인했다.
이 크로스 콘텐츠의 성공 배경에는 ‘크로스 젠더’라는 흥미로운 요소도 있었다. 국극은 알다시피 1940년대 말 시작돼 대중 영화가 일반화하기 전까지 국내에서 강력한 팬덤을 몰고 다닐 정도로 융성한 장르다. 판소리에 기반한 호소력 높은 창법,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물론이고 여성이 남성 배역까지 모두 맡으면서 연기하는 ‘젠더 크로스’가 다른 콘텐츠는 주기 힘든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안겼던 장르다.

젠더 크로스의 여정은 무대예술의 역사와 함께했다. 혹시 ‘파리넬리’를 아시는지. 1994년 동명의 영화가 널리 알려졌기에 가상의 인물처럼 생각되지만 파리넬리는 실존 인물이다. 이탈리아 남부에서 태어나 유럽을 뒤흔든 카스트라토, 카를로 브로스키(1705~1782)의 무대 이름(예명)이 파리넬리다. 카스트라토가 무엇인가. 카운터테너와는 한끗 차이다. 보기에 따라선 천양지차다. 카운터테너가 부단한 훈련을 통해 여성의 음역을 내는 남성 성악가라면, 카스트라토는 변성되기 전의 소년이 물리적 거세를 통해 음역의 한계를 극복한 경우다.


영화 <파리넬리>(1994)의 실제 모델, 카를로 브로스키(Carlo Broschi)



파리넬리는 지금으로 치면 이류 스타였다. 일류에 못 미치는 이류(二流)가 아니다. 21세기 초 한국 문화의 물결, 즉 한류(韓流)가 아시아를 휩쓸었듯 파리넬리는 가히 이탈리아를 대표한 18세기 이류(伊流)의 선봉장이었다. 오스트리아·영국·스페인을 주유하며 활동하고, 전 유럽에 자신의 이름을 떨쳤다. 당시엔 음원도 음반도 없으니 가히 ‘살아 있는 전설’이었을 것이다. 영국 활동 때는 헨델의 견제를 받았다. 은퇴 뒤에도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그의 아들 볼프강 아마데우스의 예방을 받았을 정도다. 파리넬리의 매력이 어느 정도였기에…. 남성이 가진 풍부한 성량에 여성을 위협할 정도의 고음까지 갖췄다고 한다. 지난 4월,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열린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의 바흐 ‘마태 수난곡’ 무대에서 카운터테너 필리프 자루스키의 열창을 들으면서 잠시 파리넬리의 위용을 상상해 봤다. 물론 자루스키는 파리넬리와 다르다. “내가 고X라니”의 드라마 <야인시대>발(發) 영상이 회자될 정도의 현대사회에서 물리적 거세란 없다. 큰일 날 소리, 고라니보다 더 난데없는 소리다.
가까운 중국의 경극, 일본의 가부키 전통에서도 젠더 크로스는 발견된다. <파리넬리>와 1년 차를 두고 제작된 영화 <패왕별희>(1993)에서 고(故) 장궈룽(장국영)의 열연은 경극의 안팎에서 젠더 역할을 돌아보게 한다. 20세기 들어서는 한국의 국극이나 일본의 가극인 다카라즈카(寶塚)처럼 여성이 남성을 연기하는 형태의 공연이 각광받기도 했다.


국립극단 연극 <햄릿>은 젠더 프리 캐스팅으로 햄릿 공주를 주역으로 내세웠다. ⓒ국립극단



근년에 우리 공연계에서도 젠더 크로스, 젠더 프리, 젠더 벤딩 같은 키워드가 풍성했다. 연극 <햄릿>에서 햄릿을 여성이, 오필리어를 남성이 맡는다든지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를 때로 여성이 연기한다거나 김성녀 배우가 파우스트 박사를 맡는(연극 <파우스트 엔딩>) 것과 같은 작업이 이어졌다. 여성이 남녀 역할을 모두 맡은 국극 장르가 <정년이>를 통해 주목받는 동안, 올해 창극 <살로메>는 최초의 남성 창극이란 모토 아래 남성이 남녀 역할을 모두 맡아 소화하는 파격을 보여 주기도 했다.


남성 창극 <살로메>에서는 남녀 역할을 모두 남성 배우들이 맡았다. ⓒACC재단



최근 팝·록 음악계에서도 일종의 젠더 크로스가 화제가 된 사례가 있다. 미국 록 밴드 린킨 파크다. 오랫동안 밴드의 프런트맨이던 남성 보컬 체스터 베닝턴이 사망하면서 활동을 중단했는데, 올해 재결합을 선언하면서 여성 보컬 에밀리 암스트롱의 영입 사실을 밝혔다. 팬들 사이에 찬반양론이 일었지만, 지난 9월 내한 공연에서 보여 준 암스트롱의 보컬은 충분히 ‘스트롱’했다.


밴드 린킨 파크(Linkin Park)의 여성 보컬 에밀리 암스트롱(Emily Armstrong)


이 느낌으로 치면 린킨 파크의 선배 밴드가 있다. 스웨덴의 세계적 멜로딕 데스 메탈 밴드 ‘아치 에너미’는 1995년 결성 때부터 줄곧 함께한 남성 보컬 요한 리바를 내보내고 2000년 새 보컬을 영입하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독일 출신 여성 보컬 앙겔라 고소였던 것이다. 다시 상기하자면 이 팀의 장르는 멜로딕 데스 메탈이다. 멜로디가 조금 강조되긴 하지만 기본적으론 저음으로 그르렁거리는 창법인 ‘그롤링(Growling)’이 시종일관 이어져 줘야 한다. 이것은 클래식 성악으로 치면 남성이 여성의 고음역대를 커버해야 하는 카운터테너의 대척점에 가까운 파격이자 도전이며 실험이다. 하지만 앙겔라는 이 업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몇 년 전 서울에서 만난 아치 에너미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인 마이클 아모트는 “앙겔라 이후 비로소 우리 음악이 확립됐다”고 단언했다. 2014년, 앙겔라는 고단한 월드 투어 대신 자신의 삶에 집중하고 싶다며 마이크를 놓기로 했다. 후임 보컬로 추천한 것이 캐나다 출신으로 역시 여성 보컬인 얼리사 화이트글러즈. 얼리사가 살벌한 그롤링을 사자후처럼 내뿜으며 무대 위를 누비는 동안, 앙겔라는 아치 에너미의 비즈니스 매니저로서 각종 업무로 밴드를 서포트하고 있다. 다른 어떤 장르보다 마초성이 지배할 것 같은 데스 메탈 장르에서 두 여성이 팀 안팎의 주축으로 활약하고 있는 셈이다.


밴드 아치 에너미(Arch Enemy)의 여성 보컬 앙겔라 고소(Angela Gossow)와 얼리사 화이트글러즈(Alissa White-Gluz)



‘젠더 크로스’는 미투운동 이후 더욱 활발하게 일어나는 양상이다. 갖가지 젠더 크로스 콘텐츠를 보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넘어서는 대상, 즉 경계에 관해 생각하고 들여다보게 된다. ‘이것은 원작에서는 여성 역할인데 이번엔 남성이 연기한대’라든지 ‘남성의 음역대인데 여성 보컬이 잘 소화할 수 있을까’ 같은 관점, 또는 호기심이다. 젠더 크로스는, 하지만 아직 뛰어넘지 못한 경계선의 앞까지도 우리의 여린 손목을 조용히 잡아 이끌어 간다. 이념과 이념의 경계, 민족과 인종의 경계, 문화와 문화의 경계, 인간과 기계의 경계…. 우리 앞에는 아직도 건너지 못한 경계선이 수두룩하고 인류의 미래는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경계선을 우리 앞에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그 수많은 경계선 앞에서 우리는 앞으로도 망설이고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갈라서게 될 수도 있다. 그럴 때 우린 또 무대 뒤로 갈 것이다. 예술이란 이름의 미묘하며 섬세한 날개옷을 갖춰 입고, 저 둥글고 부드러운 쇄빙선에 올라탄 채 조명 앞으로 나서기 위해서.


글.임희윤
기자·평론가. 국악·대중음악·클래식·영화음악을 두루 다룬다.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한국힙합어워즈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몸속에 꿈틀대는 바이킹과 도깨비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