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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호 Vol. 413

한국무용의 시대, <향연>이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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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무용단 <향연>

한국무용의 시대,
<향연>이 예고했다

한국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타고, 대중문화계가 ‘K’ 전성시대를 맞은 지금, 공연예술도 뭔가 보여 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 ‘뭔가’를 꼭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향연>이 증명하고 있다.




한국무용의 시대가 열렸다. 최근 발레와 현대무용, 한국무용 세 장르의 젊은 남성 무용수들이 대거 출동한 춤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테이지 파이터>에서 한국무용과 국립무용단 출신 최호종 등 한국무용수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고 있다. 한국무용 댄스필름 풀 버전이 다른 장르의 3배 가까운 조회수를 기록하고, 유튜브 인기 급상승 동영상 상위권에 랭크될 정도다. 
대중매체에 곧잘 비치는 발레나 현대무용과 달리 한국무용은 소수 전문가의 영역으로 여겨져 왔다. 대중의 인식 속에 오래된 이미지로 박혀 있었던 이유다. 그런데 ‘K’의 시대에 수려한 외모의 한국무용수가 도포 자락 휘날리며 섹시한 자태로 등장해 박력 있는 춤사위를 보여 주니, 대중이 깜짝 놀랐을 법도 하다. 
사실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다. 지난해 뉴욕 링컨센터 공연을 전 회차 전석 매진시킨 서울시무용단의 <일무>(2022)가 한국무용이 세계적으로 뻗어 나갈 가능성을 증명한 바 있다. 패션디자이너 출신의 비주얼 마스터 정구호의 세련된 연출과 현대무용가 김재덕·김성훈 등이 속도감 넘치게 재해석한 궁중무용 <일무>는 K-팝 댄스 칼군무의 원형으로 보일 만큼 매력적이었다. 
이 또한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일무> 이전에 <향연>(2015)이 있었다. 12월 6년 만에 돌아오는 국립무용단의 대표 레퍼토리다. 다양한 민속무용을 갈라 형식으로 묶은 오랜 레퍼토리 <코리아 환타지>를 리모델링한 작품이다. 조흥동·이매방·김영숙·양성옥 등 전통춤의 대가들이 안무를 맡아 궁중무용과 종교무용까지 포괄한 데다 전설적 춤꾼 이매방의 ‘이매방 오고무’까지 재해석한 ‘전통춤 종합 선물 세트’지만, 정구호의 미니멀리즘 연출로 훌쩍 업그레이드되며 화제몰이에 성공했다. 2015년 초연 이후 4년 연속 5차례 공연에서 모두 매진을 기록했고, 특히 2017년 공연 당시 2030 예매율 60% 이상을 기록, 관객 저변 확대에 성공하며 한국무용 대중화의 초석을 놓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국립극장은 이번 시즌을 무용 공연으로선 보기 드문 6일간 7회 장기 공연으로 야심만만하게 추진했다. 마침 한국무용이 유례없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지금, 그 시발점이라 할 <향연>을 되짚어볼 만하다. 대중매체를 통해 조명되고 있긴 하지만, 장르 융합을 시도하는 프로그램 특성상 한국무용만의 고유한 오라(Aura)가 희석되어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향연>에서는 ‘찐’ 한국무용의 오라가 생생하다. 가장 전통적인 원형을 추구하는 안무가들이 우리 춤선을 굳건히 지킨 상태에서 오로지 연출만으로 변화를 일궈 냈기 때문이다. 국립무용단의 전작 <단> <묵향> 등에서 내공을 쌓은 정구호의 연출력이 정점을 찍은 무대이기도 하다.

정구호는 한국의 전통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 주는 프리젠터다. 통상의 한국무용 갈라가 전통 한정식이라면, <향연>은 번잡한 양념을 걷어 내고 재료 본연의 맛을 극대화해 예술로 승화시킨 파인다이닝 코스랄까. <향연>의 미덕은 겉보기만 모던하게 꾸민 것이 아니라 각 춤의 철학과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 극대화한 데 있다. 궁중무로 예를 갖추며 시작해 종교적 의식을 거쳐 민속무로 축제 분위기를 띄우고, 대화합을 기원하는 태평무로 마무리하는 흐름이 기승전결의 플롯을 갖췄다. 음악도 번잡하게 들리는 선율을 제거하고, 뼈대인 타악 리듬에서 시작해 조금씩 살을 붙여 가며 국악의 매력을 구조적으로 느끼게 했다.
구성은 전통을 지키면서도 스타일리시한 무대로 크게 호응받은 <묵향>(2013)을 확장한 형태다. 11가지 다른 춤을 봄·여름·가을·겨울 총 4막에 배치했다. 단순 비트에서 다채로운 가락에 이르기까지 점점 상승하는 음악과 함께 의상과 무대도 무채색에서 오방색으로 나아가며 버라이어티한 한바탕 ‘향연’으로 치닫는 구조다.




막이 열리면 온통 흰 세상이다. 격조 있는 궁중무용으로 우리 예술의 위엄을 보여 주며 1막 ‘봄’을 연다. 갓 싹을 틔운 목련꽃 가지 같은 적(翟)을 든 백의(白衣)의 무용수들이 낭랑한 소리에 맞춰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종묘제례악의 ‘전폐희문’을 악기 경(磬)에만 의존해 경건함을 더한다. 여성들이 모란을 꺾으며 추는 ‘가인전목단’은 모란 꽃병 대신 민화 모란도를 추상화한 거대한 붉은 매듭이 압도적이다. 군왕의 무공을 찬양하는 ‘정대업지무’까지, 화려한 색상을 걷어 내고 무채색만 남긴 정구호 미니멀리즘의 극치다. 
2막 ‘여름’은 불교와 무속의 기원 의식을 바탕 삼은 종교 제례무용이다. 굿거리장단과 함께 춤도 역동적으로 변해 간다. 반짝이는 은색 바라를 든 바라춤, 붉은 조명 속 승무를 거쳐 사정없이 꽹과리를 두드리는 진쇠춤으로 고조되어 가는 무대에 관객의 신명도 더해 간다.
3막 ‘가을’은 축제다. 무대 전체가 청명한 가을 하늘이 되어 두둥실 구름을 띄우고, 청색 두루마기의 한량무와 백색 두루마기의 학춤이 섞였다 흩어졌다 선비춤으로 어우러진다. 그 뒤로 몰아치는 장구춤과 소고춤, 이매방 오고무 퍼레이드는 그야말로 스펙터클의 ‘향연’이다. 장구를 머리 위에 얹고 놀라운 속도로 수십 바퀴를 도는 여성 무용수의 솔로는 고전발레의 그랑 푸에테 못잖고, 소고춤의 남성 무용수들은 ‘선자’ ‘자반’ 등 각자 다른 솔로로 기교를 뽐낸다. 압권은 ‘이매방 오고무’의 창의적 연출이다. 어둠 속 솟아오른 솔로가 난타 치듯 맹렬한 두드림으로 장을 열면, 가로로 길게 선을 그리던 북들이 90도 회전하며 하나의 점이 된다. 노란 치마를 두른 여성 무용수 18명이 현란한 북춤을 출 때 빙글빙글 회전하는 무대가 이들의 춤사위를 입체적으로 속속들이 조망하게 한다.




4막 ‘겨울’은 총예술감독 조흥동이 이 작품을 위해 창작한 ‘신태평무’로 꾸며진다. 왕과 왕비가 상궁들과 함께 어우러져 태평성대를 바라던 ‘태평무’를 남성과 여성이 번갈아 가며 추다가 다 함께 무대에 올라 나라의 안녕과 태평성대를 기원하며 대미를 장식한다. 이때 비로소 전통의 오방색이 갖춰진다. 흰 바닥에 검정 벽을 세우고 노랑과 초록 매듭 7개를 드리운 사이사이 청·홍 의상의 남녀 무용수가 교차하며 우리 민족의 화려한 색감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다. 이번 시즌에는 처음으로 스크린 대신 LED 패널을 활용해 색채의 강렬함을 더욱 선명하게 전달할 예정이다. 

정구호 판 한국무용의 세계적 경쟁력은 그가 무용가들에게 주문하는 춤이 스토리를 배제한 추상적 동작의 반복으로 리듬과 패턴을 만들어 내는 데 있다. 정구호의 전통 활용 공식은 모더니즘 회화를 닮았다. 이야기에 봉사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음악을 닮고 싶어 바흐의 대위법을 연구한 파울 클레나 칸딘스키의 추상회화 못잖게 ‘감정 없는 한국무용’이 던지는 충격이다. 정구호 자신도 “미술도 인상주의에서 모던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해체와 재조립을 거친 것처럼, 한국무용 공연도 문창살·버드나무·달 같은 전통적인 요소를 해체하고 아이코닉하게 정리해 하나의 장면이 각인되게 하려는 게 늘 목표”라고 했다.  
<향연>이 있기까지 한국무용에 많은 도전이 있었다. 오랜 세월 무용극 위주로 전개되는 신무용의 틀에 갇혀 있던 국립무용단은 2010년대 들어 현대무용가 안성수의 <단>(2012)을 시작으로 핀란드 출신의 현대무용가 테로 사리넨의 <회오리>(2013) 등 서사가 없는 추상무용 대작들로 알을 깨고 나오려는 시도를 수차례 했다. 하지만 현대무용가가 만들어 내는 파격적 움직임이 안무의 정체성 면에서 이론의 여지를 남겼다면, <향연>은 한국무용의 오라를 오롯이 지키면서도 새로움을 구현해 내며 진정한 ‘한국무용 현대화’의 전범이 됐다. 2퍼센트 아쉬운 <스테이지 파이터>를 보며 <향연>을 떠올리는 이유다.


글.유주현
『중앙선데이』 기자.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일본의 다카라즈카 가극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국립무용단 <향연>

일정 2024-12-19 ~ 2024-12-25 | 시간 화·목·금 19:30, 수·일 15:00, 토 15:00, 19:30

장소 해오름극장 | 관람권 VIP석 7만 원, R석 5만 원, S석 3만 원, A석 2만 원 | 문의 02-2280-4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