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호 Vol. 412 박(拍)을 타면 희망이 열린다달다 / 미리보기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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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완창판소리> 김차경의 만정제 ‘흥보가’ 박(拍)을 타면 희망이 열린다 그야말로 우리 소리 한 자락 듣기 좋은 때가 아닐 수 없다. 11월의 좋은 시절, 좋은 소리로 완창 무대를 빛내 줄 주인공은 김차경 명창이다. 1984년부터 40여 년간 국립창극단원으로 활동하고, 현재는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에서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소리꾼 김차경. 그녀가 국립극장에서 완창 공연을 하는 것은 14년 만이다. 그사이 명창의 소리는 더욱 깊어지고 완숙해졌다. 관객과 자연스럽게 호흡하며 전체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김차경 명창의 소리 길과 그녀가 들려줄 만정제 ‘흥보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타고난 목으로 묵묵히 걸어온 소리 길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김차경 명창은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노래 부르기를 워낙 좋아하기도 했거니와 초등학교 시절 교내 합창단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활동했다. 그런 그녀가 국악의 고장 남원에서 판소리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11세 때 남원국악원의 강도근 명창에게 토막 소리를 배우며 판소리에 입문했고, 이후 그녀의 타고난 음악성을 알아본 성우향·김소희 명창에게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를 사사하며 소리 기량을 쌓아 갔다. 두 스승은 김차경이 판소리 한길을 꾸준히 가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성우향 명창은 김차경에게 서울예술대학교 진학을 권하며 그녀가 소리꾼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김차경이 대학 졸업 후 이른 나이에 국립창극단에 입단한 것도 스승의 조언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 국립창극단에서 만난 또 다른 인생 스승 김소희 명창은 지르는 대로 올라가는 김차경의 단단한 목과 애원성이 깃든 성음을 귀하게 여겨 치열하게 판소리할 것을 강조했다. 김소희 명창은 바쁜 와중에도 김차경의 레슨 시간을 늘려 가며 똘똘한 제자가 자신의 소리를 최대한 많이 받아 가길 원했다. 김차경에게 성우향·김소희 명창은 부모와도 같은 스승이었다. 그들은 단지 그녀에게 소리만을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그녀가 생활의 어려움을 겪을 때도 공부에 매진할 수 있도록 많은 격려와 지지를 해주었다. 이후 김차경은 안숙선·김경숙 명창과 인연을 맺으며 판소리의 더 깊은 세계를 더욱 경험했다. 그리고 박양덕 명창에게는 남도민요 전반을 아우르는 소리를 배우며 자신의 소리 세계를 다져 나갔다. 김차경은 말한다. 돌이켜 보니 자신은 정말로 선생님 복이 많았고, 사랑을 듬뿍 받으며 소리한 행복한 소리꾼이었다고. 김차경은 스승들의 기대와 욕심 있는 가르침에 힘입어 판소리에 매진한 끝에 2009년 제36회 춘향국악대전 판소리 명창 부문에서 대통령상을 거머쥐었다. 이후 2019년 아시아문화경제진흥대전 전통예술 부문 수상, 2020년 대한민국문화공헌 판소리 부문 대상을 수상해 명실공히 오늘날 판소리 명창으로 우뚝 섰다. 올해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의 예술감독을 맡게 된 김차경은 요즘 들어 부쩍 우리 가창의 뿌리로서 판소리에 대한 긍지가 커지고, 이 소리를 후학들에게 잘 전수해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강해진다고 한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장시간 완창을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에도 그녀가 기꺼이 완창 무대에 서는 이유도 스승이 아낌없이 내어 준 좋은 소리를 계속해서 관객과 나누고, 이를 올곧게 전승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다. 김소희의 음악적 지향으로 재정립된 만정제 김차경이 이번 완창 무대에서 선보일 소리는 만정제 ‘흥보가’다. 이 소리는 만정 김소희가 박록주에게 배운 ‘흥보가’를 뼈대로 삼아 자신만의 음악적 지향으로 재정립한 소리다. 김소희는 타고난 음악성을 바탕으로 송만갑·정정렬·박동실·정응민·정권진·박봉술·박록주 등 당대 내로라하는 명창을 사사하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 즉 ‘만정제’를 구축한 20세기 최고의 명창 가운데 한 명이다. 만정제 ‘흥보가’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소리는 박록주의 ‘흥보가’를 기본으로 했기에, 완창 시간은 2시간 내외로 짧고 동편제의 단단함과 우조의 꿋꿋함을 잘 간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높은음을 많이 쓰지 않는 박록주와 달리 상청을 즐겨 쓴 김소희의 창법, 매 장단 끝을 짧게 끊는 박록주와 달리 장단의 마지막 박까지 소리를 길게 끌어 부르는 김소희의 음악적 면모 또한 담고 있다. 이를테면 ‘저아전 보아라’ ‘첫번째 돈타령’처럼 계면성이 약한 대목에서 김소희는 박록주처럼 부르며 동편제의 멋을 충실히 보여 준다. 그러나 ‘가난타령’ ‘흥보매맞는대목’ ‘박타령’ 등 계면성이 강하게 나는 곳에서는 시김새와 장식음을 추가하고 선율을 다이내믹하게 만들어 슬픔을 더욱 짙게 표출한다. 이는 김소희가 송만갑·박록주·박봉술 등 동편제의 맥을 이은 스승과 정정렬·정응민·정권진·박동실 등 서편제의 계보를 이은 스승의 소리를 두루 익혔기에 가능한 것이다. 물론 김소희의 창조적 예술성과 이를 모두 표현할 수 있는 타고난 목구성, 그리고 판소리에 대한 도전 정신도 큰 몫을 했다. 김차경은 어린 시절 강도근 명창에게서 동편제의 단단함과 꿋꿋한 소리 특색을 자연스럽게 익혔다. 강도근 선생의 소리에 대한 첫 가르침은 그녀의 소리 바탕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도 김차경은 애원이 깃든 성음을 가지고 있고, 무리 없이 올라가는 짜릿한 상청을 구사할 수 있는 소리꾼이다. 만정 선생이 김차경을 아낀 것도 그녀의 탄탄한 기본기에 타고난 소리 기량이 자신의 소리를 잇기에 더없이 좋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완창은 만정 김소희가 정립한 ‘흥보가’를 김차경의 완숙한 소리로 들을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담백한 ‘흥보가’가 주는 희망의 메시지 만정제 ‘흥보가’는 박록주의 ‘흥보가’를 뼈대로 삼은 만큼 놀부 박타는 대목이 없다. 사설의 간명함을 추구하고, 놀부 박타는 대목의 놀이성과 유희성을 가벼이 여긴 명창들의 의식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심술궂고 욕심 많은 놀부가 패망하는 서사가 주는 통쾌함은 없지만, 마음씨 착한 흥부가 고생 끝에 부자가 되는 서사가 주요하게 다뤄진다. 이를테면 흥부 부부가 놀부에게 쫓겨나는 대목, 흥부의 아내가 가난으로 탄식하는 대목, 제비가 흥부에게 박씨를 물어다 주는 대목, 그리고 흥부가 마침내 박을 타 부자가 되는 대목 등이 핵심이다. 매일매일 품을 팔고 임노동을 하며 열심히 살아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흥부 부부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울림을 준다. 그들의 고단한 삶을 둘러싼 사회·경제의 구조적 모순이 결코 남 일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흥부는 마침내 행운을 거머쥔다. 자신의 삶을 성실히 살며 팍팍한 삶 속에서도 선한 마음을 잃지 않은 과정에서 말이다. 이야기 속 흥부의 행운은 비현실적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한탕주의, 불가능한 꿈을 의미함은 아닐 것이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가치를 잘 지키며 살다 보면 나에게도 언젠가 좋은 기회가 올 것이라는 희망일 것이다. 박을 타며 부자가 되는 흥부 이야기가 지치고 고단한 오늘날 우리에게 흥겨움과 희망을 줄 수 있길 바란다. 글. 송소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2017년 「20세기 창극의 음반, 방송화 양상과 창극사적 의미」로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하고, 판소리와 창극 관련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국립극장 <완창판소리> 11월: 김차경의 흥보가 - 만정제 일정 2024-11-23 | 시간 토 15:00 | 장소 달오름극장 관람권 전석 2만 원 | 문의 02-2280-4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