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호 Vol. 412 줄 위로 뛰고 소리로 날던 예인(藝人)을 아시오?내다 / 스페셜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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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로 보는 이날치 줄 위로 뛰고 소리로 날던 예인(藝人)을 아시오? 이름을 날린 것에 비해 마지막 행보나 삶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그의 생사와 어떤 소리꾼이었다는 짧은 기록이 존재할 뿐이다. 이날치는 19세기 후반기에 활동한 조선 후기 8명창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날치는 처음부터 판소리 창자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 박만순이라는 명창의 고수와 줄타기 명인으로 활동하다가 뒤늦게 독공을 통해 명창이 되었다. 이날치는 뛰어난 소리 실력으로도 유명하지만, 극적인 삶을 살았던 예인으로도 유명하다. 이날치가 판소리 명창으로 인정받기까지의 과정과 이날치 소릿조의 특징, 그의 활동 양상 및 소리 계보를 이날치와 관련된 기록이나 구술 자료를 통해 차례로 살펴보겠다. 이날치는 전라남도 창평군 동면 삼지천(현재 지명으로는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 출신으로 본명은 이경숙(1820~1892)이다. 본명보다 많이 알려진 ‘날치’라는 이름은 “날쌔게 줄을 잘 탄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전한다. 줄광대들은 줄을 타는 중간중간에 재담뿐 아니라 ‘중타령’이나 ‘팔선녀타령’ 등의 소리를 부르기도 했으므로, 이날치가 원래 기초적인 소리 실력이나 명창으로서의 기본 자질은 갖추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더구나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 <회혼례도> 그림이나 송만재의 「관우희(觀優戱)」를 보아도 조선 후기에는 판소리만 따로 공연하기도 했지만 판소리와 줄타기 공연을 함께 벌이는 경우도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날치는 줄광대로 활동하던 시절에도 이미 판소리 명창들과 교류하며 귀명창의 경지에 올라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젊은 시절 줄을 타서 명성을 얻은 이날치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든 후에는 줄광대를 그만두고 고수로 활동했다. 『조선창극사』(1940)에 따르면 이날치는 19세기 후반기 박만순의 수행 고수 노릇을 하다가 박만순의 오만한 성격과 명창에 비해 박한 대우를 받는 고수 생활에 불만을 품고,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1고수 2명창’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고수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주는 오늘날과 달리 전통사회에서는 판소리 명창과 고수의 공연 사례비가 10대 1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하니, 고수로서 판소리 명창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현실에 충분히 불만을 가질 만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막상 그런 상황이더라도 고수 활동을 전격적으로 그만두고 판소리 명창에 도전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이날치가 서편제의 창시자 박유전에게 소리를 배운 후 결국 박만순과 나란히 후기 8명창으로 이름을 얻은 것을 보면, 이날치가 명창이 될 만한 역량을 이미 갖추고 있던 숨은 소리 천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조선창극사』에는 이날치가 판소리를 부를 때 나팔 소리나 종 치는 소리를 그대로 모방해 청중이 마치 그 소리를 실제로 듣는 듯 느끼게 하는 소리 실력이 뛰어났던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1) (이날치는) 포부가 굉장하고 기예가 비범할 뿐더러 그 수리성인 성량이 거대하여 ‘춘향가’를 할 때에 나팔을 방창(倣唱)하면 완연히 실물로 불어 내는 소리를 내고, 인경은 ‘뎅뎅’ 하면 꼭 실물의 인경 소리가 일촌(一村) 일동(一洞)에 향응하였다 한다. 또한 이날치가 ‘새타령’을 부르면서 새소리를 흉내 내면 실제 새들이 날아들었다는 일화2)가 전할 정도로 이날치의 ‘새타령’은 독보적이었다고 한다. 이날치의 ‘새타령’은 전무후무할 만큼 당시 독보적이었다. 법국새 쑥국새의 소리를 하면, 실물의 새가 소리를 따라 날아 들어온 일이 간혹 있었다고 전하는 말이 있다. 현재 한시가(漢詩家)로 저명한 우정(偶丁) 임규(林圭) 씨의 말을 들으면, 그가 연소(年少) 시대에 자기 고향인 익산 부근 심곡사에 가서 이날치의 ‘새타령’을 듣는데, 때에 쑥국새인지 법국새인지 모르나 새가 분명히 비입(飛入)한 것을 보고, 재좌(在座) 일동은 그 신기를 경탄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날치는 거칠고 탁한 듯한 수리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지며, 때로는 애원하고 한탄하는 성음으로 청중을 탄식하고 슬퍼하게 하고, 때로는 해학과 익살스러운 웃음으로 포복절도케 했다고 한다. 이러한 소리 특징으로 인해 이날치는 남녀노소, 시인·묵객·초동·목수 할 것 없이 누구나 찬미하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평이 후배 명창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서 이날치는 상당히 대중적인 소리를 구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이날치가 판소리 명창으로 성공하기 전 고수로 북 반주를 해 주었던 박만순은 이날치와 대조적으로 지식인이 칭송하고 선호하는 우조(羽調)를 주로 구사했다는 사실이다. 이날치와 박만순은 ‘춘향가’를 장기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박만순이 ‘춘향가’ 외에 ‘적벽가’를 잘 불러서 인정받았던 것과 달리 이날치는 ‘춘향가’ 외에 ‘심청가’를 잘 불러서 인기를 얻었다. 여러 면에서 이날치는 박만순과 대조적인 소리를 구사했음을 보여 준다. 이날치에 관한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1885년에 전라감영에서 잔치를 치르면서 지출한 내역을 기록한 문서로 추정되는 『연수전 중용하기』에 이날치의 이름과 그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이날치는 장자백·김세종을 비롯해 당시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여러 판소리 명창과 함께 공연해 사례를 받았는데, 김세종은 100냥의 사례를 받고 이날치와 장자백은 각각 50냥의 사례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3) 이로 보아서 1880년대에 이날치가 전라도 지역에서 거주하면서 사사놀음은 물론 관아의 행사에도 활발히 참여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시기는 이날치가 1870년 무렵 상경했다가 낙향한 후 광주 인근을 기점으로 활동하며 김채만에게 소리를 가르쳤던 때로 밝혀져 있다.4) 서편제 명창인 이날치의 소리가 그의 제자 김채만을 통해 후대 명창들에게 전수되었다는 사실은 20세기 후반기에 활동한 한승호 명창도 증언했는데, 한승호에 의하면 이날치의 소리가 김채만으로 이어졌다고 했으며 김채만의 소리는 다시 박동실로 이어졌다고 한다.5) 김채만은 ‘구성지고 맛깔난 소리’를 한다는 평을 많이 받았는데, 이러한 김채만의 소리 경향은 뛰어난 소리 공력과 다양한 성음을 바탕으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대중적인 소릿조를 구사한 스승 이날치의 소리 경향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승호에 따르면 이날치의 소리는 임방울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며, 10만 장이 팔렸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유명한 임방울의 ‘쑥대머리’ 소리가 바로 이날치가 짠 것이라고 구술한 바 있다.6) 아쉽게도 19세기 후반에 활동한 이날치의 소리를 지금 들어볼 수는 없지만, 그가 남긴 많은 일화와 임방울이 전승한 ‘쑥대머리’ 대목 등을 통해서 섬세한 소리 표현과 기가 막힌 목구성을 가졌을 이날치의 소리를 상상해 볼 수 있다. 11월 14일(목)부터 21일(목)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되는 창극 <이날치傳>에 이날치의 생애와 판소리에 대한 열정이 잘 표현되어 있기를 기대해 본다. 1) 정병헌, 『교주 조선창극사』(태학사, 2020), 117쪽. 2) 정병헌, 『교주 조선창극사』(태학사, 2020), 118~119쪽. 3) 『연수전 중용하기』에 대해서는 최동현, 「장자백과 그 일가의 판소리 인맥에 관한 연구」, 『판소리연구』 16집(판소리학회, 2003), 340쪽 참조. 4) 명현, 「이날치-김채만-장자백과 그 일가의 판소리 인맥에 관한 연구」 5) 이보형·성기련 대담/성기련 정리, 「한승호 명창 대담」, 『판소리연구』 16집(판소리학회, 2003), 369~375쪽. 6) 이보형·성기련 대담/성기련 정리, 「한승호 명창 대담」, 『판소리연구』 16집(판소리학회, 2003), 380~381쪽. 글. 성기련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교수. 18~20세기 판소리의 음악학적 연구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특히 판소리 창자의 소리관과 청중의 향유 양상 등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다. 그림. 선우 일러스트레이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