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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호 Vol. 407

예술가의 초상

맺다 / 재주 많은 소리꾼의 입체적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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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김수인

재주 많은 소리꾼의 입체적 소리

“저를 너무 힘들게 한 존재이던 판소리가 지금은 저를 지탱해 주는 친구가 됐죠.
소리가 제 뼈가 되고 근육이 된 거예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소리가 그냥 제가 돼 있더라고요.
그냥 제 몸이 돼버린 느낌이요.”




최근 대중음악계에 ‘원영적 사고’가 있다면, 전통음악계엔 ‘수인적 사고’가 있다. ‘원영적 사고’를 정의하면, 인기 K-팝 걸그룹 ‘아이브’ 멤버인 장원영처럼 ‘모든 걸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다. 국립창극단원 김수인도 장원영 못지않다. 전통음악계 신흥 스타인 그는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4월까지 빠듯한 스케줄로 인해 단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했지만, 최근 국립극장에서 만난 그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은커녕 미소가 가득했다. 

“요즘 번아웃이라는 말 많이 하잖아요. 순간순간 긍정적 회로를 돌리면 괜찮아져요. 그래서 항상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하죠. 워낙 사람을 좋아하니까 다양한 스케줄로 여러 공간에서 많은 사람 만나는 것만 해도 너무 좋아요.”

김수인은 국립창극단원으로서 본연의 업무를 빈틈없이 담당하는 가운데, 휴가 등 개인 시간이 날 때엔 JTBC <팬텀싱어4>를 통해 결성된 크로스오버 그룹 ‘크레즐’ 같은 외부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김수인의 이 같은 정력적 활동에 윤활유가 돼주는 건 팬들이다. 특히 팬카페 ‘수인노정기’의 화력 지원이 대단하다. 팬카페명은 판소리 ‘흥부가’의 한 대목인 ‘제비노정기’에서 따왔다. 흥보에게 은혜를 입은 제비가 이듬해 봄에 박씨를 물고 다시 흥보네 집으로 날아오는 여정을 주제로 한다. 여정에서 제비가 다양한 풍경을 보고 느끼는 것처럼, 김수인의 여정도 그와 같기를 바라는 팬들의 마음을 담았다. 실제 김수인은 벌써부터 여러 군데를 두루 다니며 경험하고 있다.

그럼에도 김수인의 여정에서 특기할 만한 지점은, 그 과정에서 소리꾼이라는 본질은 절대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젊은 소리꾼들이 다른 영역의 예술가와 특히 차별화된 지점은 예를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수인이 잘나갈수록 고개를 숙이는 이유다. “저희는 어릴 때부터 도제식 교육을 받잖아요. 어른에 대한 예의, 인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환경에서 살았어요.”
게다가 광주광역시 무형유산 남도판소리(동초제 흥보가) 예능보유자인 김선이 명창이 그의 모친이다. 교육을 잘 받고 자랐을 수밖에 없다. 김수인에게 모친은 선생이자 멘토 그리고 선배다.
그런데 김수인은 “엄마는 역시 엄마”라고 미소 지었다. “엄마는 항상 말하셨어요. ‘내 자식 내가 못 가르치고, 내 자식이 나한테 못 배운다’고. 배우다 보면 저도 모르게 투정 부리게 되죠. 엄마는 항상 ‘뭐 챙겨 먹었느냐’고 물어보시고요.”
김수인과 모친의 관계는 더 특별하다. 형편상 몇 년 동안 모친의 학원에서 가족이 숙식한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수인적 사고’는 여기서도 시동을 건다. “그때 소리를 정말 많이 들었죠. 자면서도 소리를 듣고, 깨면서도 소리를 듣고… 말 그대로 소리가 공기처럼 있었어요. 제가 국립창극단에 있을 수 있는 게 그 덕분일지도 몰라요.”




중·고등학교 땐 무용을 했고, 군대 역시 무용병으로 복무했다. 재주가 많은 사람은 군대일지라도 가만히 두지 않는다. 무용병으로 복무하는 와중에도 김수인은 판소리·갸야금 등도 맡아야 했다. 그렇게 창극단 배우에 걸맞은 ‘종합예술인’으로서 무럭무럭 성장했다.
2020년 드라마틱한 경쟁률로 유명했던 국립창극단 신입 단원 오디션을 볼 때도 “춤선이 너무 멋있다. 태가 다르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소리도 잘하고 몸도 잘 쓰는 그는 천생 창극 배우다. “제가 하고 싶은 것이 다 모인 곳이 국립창극단이라 더 갈망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김수인이 맡는 캐릭터마다 입체적이라는 평이 따랐다. 이미 전형화가 된 ‘춘향’의 몽룡도 김수인을 거치면 예외 없다. 발랄하고 세련된 ‘젠지(Gen-Z) 몽룡’의 탄생이었다. “‘내가 몽룡이 되지 말고 몽룡이 내가 돼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극 초반에 깨방정도 떨고 그랬죠. 하하.”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어왕>을 재해석한 국립창극단 <리어>에서 그가 맡은 역할 에드먼드는 ‘나쁜 남자’의 전형인데 “그의 결핍에 불쌍함을 느꼈다”라며 인간적 해석을 더하기도 했다.

김수인을 보고 있노라면, 자기 예술적 표현이 확실해야 설득력이 생긴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런데 김수인의 예술적 스펙트럼이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그의 예술적 관심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최근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단색화 거장 이우환에게 빠졌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 위치한 북라운지에 그가 추천한 이우환 관련 책(『여백의 예술』, 현대문학, 2002)도 비치될 예정이다.
“제가 요즘 미술에 빠졌는데, 화려하지 않은 그림이 좋더라고요. 특히 단색화요. 그래서 이우환 선생님, 박서보 선생님, 김창열 선생님의 작품이 너무 재밌는 거예요. 특히 이우환 작가님의 작품은 화려한 태평무가 아닌 살풀이나 승무처럼 미니멀한 느낌이 들어요. (종합예술인) 창극과는 조금 다르지만, 판소리와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죠. 소리만큼 미니멀한 예술이 없잖아요.”

김수인의 예술적 관심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인테리어도 좋아해 집을 꾸미는 것에도 열심이다. 패션에도 관심이 많아 해외에서 열리는 각종 ‘패션 위크’ 중계 영상도 꼬박꼬박 찾아본다. 
“최근 열린 메종 마르지엘라 쇼를 꼭 보세요. 1920~30년대 파리의 뒷골목을 표현했는데, 저는 보는 순간 압도당했어요. 무용수를 모델로 썼나 싶을 정도로 움직임이 좋았는데 모델이 연기도 하고 춤도 춰요. 특히 비에 적신 옷을 표현하는데 빗방울을 비즈(beads)로 박아서 나타냈더라고요. 예술은 ‘정말 무한하구나’ 느꼈어요. <절창Ⅳ> 의상을 맡으신 차이킴 김영진 선생님하고 그 얘기를 한참 했어요.”




예술이 무한하다는 건 김수인도 증명하고 있다. 성악 기반의 출연자가 대다수인 <팬텀싱어4>에 나가 두각을 나타낸 것이다. “용기보다는 배짱으로 나갔다”며 웃었다. “음악을 좋아하고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니까 재밌겠다고 나갔는데, 기대 이상으로 좋았어요. 제가 팝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국악인에게 팝을 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는 것이 <팬텀싱어>라고 생각해요.”

그런 가운데 5월 17~18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열린 <절창Ⅳ>에선 소리꾼으로서 면모를 재확인했다. 8시간짜리 판소리 ‘춘향가’를 100분으로 줄였는데, 정수만 뽑아냈다. 국립창극단원인 조유아와 함께 꾸민 무대인데, 김수인은 판소리 명창인 동초 김연수로부터 전해 내려온 동초제 ‘춘향가’를 들려줬다. 동초제는 현존하는 판소리 중에 역사가 가장 짧은 편이지만, 가장 현대에 만들어진 만큼 한결 더 세련미를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듣는다고 김수인은 전했다.
모던함은 컨템퍼러리 극장을 표방하는 국립극장 그리고 그 속에서 끊임없이 전통을 재해석하는 국립창극단의 기질과 맞물린다. 김수인은 “전통에 기반을 둔 실험과 창작을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곳만 한 데가 없다”라고 자부한다. “<리어> <베니스의 상인들> <나무, 물고기, 달> <트로이의 여인들> <패왕별희>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 등의 작품에서 보듯 국립창극단만큼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는 곳이 없어요.”

하지만 판소리는 그에게 시련을 안기기도 했다. “높은 음역을 내기 위해 힘겹게 노력했어요. 그 많은 판소리 가사도 외워야 했고, 공력도 키워야 했죠. 그런 점들이 저를 점층적으로 괴롭혔어요. 그런데 그것들을 (게임) 퀘스트 깨듯 하나하나 돌파했죠. 지금은 어느 정도 높은 음역대도 가능하고, 가사는 제 몸처럼 익혔고, 공력은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래도 2~3시간은 무대에서 소리할 수 있을 만큼 배의 힘도 찼어요. 그러다 보니까 정말 저를 너무 힘들게 한 존재이던 판소리가 지금은 저를 지탱해 주는 친구가 됐죠. 차를 타고 오며 가는 시간에도 소리를 할 정도예요.”
김수인은 이를 “옹이 박힌다”고 표현했다. ‘옹이’는 나무의 몸에 단단하게 박힌 가지의 밑부분을 뜻한다. “소리가 제 뼈가 되고 근육이 된 거예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소리가 그냥 제가 돼 있더라고요. 그냥 제 몸이 돼버린 느낌이요.”


글.이재훈 『뉴시스』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