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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호 Vol. 405

25세에 입문한 35년 차 소리꾼의 내공

달다 / 미리보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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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미의 박봉술제 ‘적벽가’
 25세에 입문한 35년 차 소리꾼의 내공

분석력과 연기 내공으로 완성할 영웅호걸의 치열한 전투,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인간적 고뇌와 갈등.
노년의 송화로, 헤큐바로, 채공선으로 분하며 쌓아 올린 노련함이 빛날 박봉술제 ‘적벽가’를 만나볼 시간이다.




춤과 노래로 발현된 국악 DNA

김금미 명창은 남도민요 소리꾼 김옥진 명창을 외할머니로, 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홍성덕 명창을 어머니로 둔 예인 집안 출신의 소리꾼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소리를 익힌 것은 아니다. 고교 시절 우연히 전통무용 동아리에서 취미로 시작한 춤에서 좋은 몸짓과 기량이 나왔고, 이를 눈여겨본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여성국극 무대에 서면서 전통음악을 만나게 됐다. 그녀는 소리를 배우지 않았어도 좋은 목청과 정확한 음정과 박자를 낼 수 있는 음악성으로 여성국극 무대에 섰지만, 전통의 가무를 온전히 소화해 내기 위해선 그 근간이 되는 ‘소리’가 중요하다는 주변의 조언이 있었다. 그리하여 스물다섯 나이에 성창순 명창을 만나며 판소리에 입문했다. 

처음 김금미를 만난 성창순 명창은 ‘심청가’ 가운데 뺑파가 황성을 가면서 ‘메나리조’로 노래하는 대목을 시켜보며, 이른바 성음 테스트를 했다. 여성국극의 창을 해봤을 뿐, 판소리는 익숙지 않았던 그녀였지만 스승의 소리를 곧잘 따라 했고, 이를 들은 성창순 명창은 빙그레 웃으며 “어, 쓰겄다” “허면 되겄고만!”이라고 했다. 이후 김금미는 매일같이 스승을 찾아가며 ‘심청가’를 익혔다. 

판소리 전승 오가를 두루 익히기 위해 다양한 목이 필요했던 그녀는 동편제 소리의 매력을 알고자 김영자 명창을 찾아가 힘 있고 묵직한 성음의 정광수제 ‘수궁가’를 사사했고,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수행하며 김경숙 명창에게 호방한 기운이 특장인 박봉술제  ‘적벽가’를 익혔다. 이 과정에서 김금미는 다양한 방식으로 소리의 외연을 넓힐 수 있었고, 여러 스승의 소리 세계를 통해 판소리에 더욱 심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진정한 소리꾼으로 성장시켜 준 국립창극단

김금미는 199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해 올해로 24년 가까이 단원 생활을 해온 창극단의 대표 배우다. 입단할 당시 판소리 수련생으로 창극 무대 경험이 많지 않았던 만큼, 자신의 판소리 기량을 높이기 위한 진지한 고민을 다시금 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완성형으로 보이는 그야말로 ‘날고 기는’ 동료 소리꾼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음역대는 물론 시김새·성음·발성까지, 뛰어난 기량을 지닌 동료들 사이에서 ‘판소리’, 그리고 ‘소리꾼’의 정체성과 이를 갖추기 위해서 무엇을 익혀야 하는지를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단체에서 부끄럽지 않은 단원, 정말 좋은 소리꾼이 되어야 한다는 다짐을 수없이 하며 소리 공부에 매진했다. 이후 그녀는 창극 <수궁가>의 토끼, <장화홍련>의 허씨, <서편제>의 노년 송화, <패왕별희>의 맹인 노파, <정년이>의 채공선 등 국립창극단의 여러 작품에서 주요 배역을 맡으며 꾸준히 성장했고, 오늘날 창극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이끄는 중견 소리꾼으로 활약하고 있다. 특히 그녀는 2016년에 국내에 초연해 미국·싱가포르·영국·네덜란드 등에서 한국 창극의 매력을 선보인 <트로이의 여인들>의 히로인(heroine)을 맡기도 했다. <트로이의 여인들>은 2023년 7월 영국 신문 『가디언』의 ‘에든버러 축제에서 꼭 봐야 할 공연 50가지 공연’에 선정돼 초반부터 주목을 받았고, 별 다섯 개의 만점에서 만점의 리뷰를 받으며 판소리의 매력을 해외에 널리 알렸다. 김금미는 이 무대에서 트로이의 왕비 헤큐바 역을 맡아 패전국 트로이의 여인들이 처한 비극과 고통의 상황을 한탄과 절규의 목소리로 절절히 토해내며 그녀의 소리와 연기에서 최고 기량을 선보였다. 


인물에 깊게 몰입해 표현할 ‘적벽가’ 

김금미는 창극 배우로서의 정체성 못지않게 판소리 ‘소리꾼’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한다. 그녀는 소리는 “나의 자존심이자 자긍심”이라며, 소리 공부에 대한 열정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소리꾼이라면 다섯 바탕의 소리와 그 흐름을 제대로 익혀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여러 스승을 졸라가며 소리를 배우고 익혔고, 그 시간이 그녀에겐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런 그녀가 이번 무대에서 선보일 소리는 박봉술제 ‘적벽가’이다. 이 소리는 송만갑·박봉래·박봉술로 이어지는 동편제 소리로, 김금미는 김경숙 명창에게 10여 년간 ‘적벽가’를 차근차근 학습했다. 김경숙 명창은 박봉술 명창에게 ‘적벽가’ 한 바탕을 오롯이 전수받아 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김금미에게도 자신이 가진 소리를 “아낌없이” 내줬다. 

‘적벽가’는 상당한 공력이 필요한 작품이다. 거칠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은 상황과 인물로 짜인 극이기 때문이다. 또 호방함과 더불어 난세를 타계하고자 한 영웅호걸의 장중한 모습을 표현해야 하고, 치열한 전투와 그 안에서 묻어나오는 인간적 고뇌와 갈등을 세밀하게 그려내야 한다. 이를테면 ‘적벽가’의 눈대목 가운데 하나인 ‘새타령’의 경우, 조조는 난세의 간웅(奸雄)이자 용렬한 자로 묘사되지만, 그가 군사를 잃고 쫓기는 와중에 듣는 원조(怨鳥) 소리와 그로부터 표출되는 회한과 상실의 고통은 인간적으로 그려져야 한다. 이 같은 인물에 대한 연기는 끈질긴 탐구와 몰입이 있어야만 극적으로 발현된다. 

그런 면에서 김금미는 이를 분석할 줄 아는 안목을 지녔고, 창극을 통해 다져온 내공으로 훌륭한 연기 기량까지 갖췄다. 사설과 음악에서 난도가 높은 ‘적벽가’를 자신만의 해석과 표현으로 만들어낼 김금미의 완창을 기대해 본다.


글. 송소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20세기 창극의 음반, 방송화 양상과 창극사적 의미」(2017)로 박사 논문을 제출하고
 판소리와 창극 관련한 연구를 꾸준히 수행하고 있다.


국립극장 <완창판소리> 4월: 김금미의 적벽가 - 박봉술제 

일정 2024-04-13 | 시간 15:00 | 장소 국립극장 하늘극장 

관람권 전석 2만 원 | 문의 02-2280-4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