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미르 상세

2024년 4월호 Vol. 405

미묘하거나 빠져들거나

달다 / 미리보기 1

페이스북 트위터 URL공유

국립극장 <엔톡 라이브 플러스>

미묘하거나 빠져들거나

2024년 세계 공연 시장은 포스트 코로나 국면에 접어들었고, 연극 공연의 영상화를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전통의 국제적 강자가 간추려졌다. 엔톡 라이브 플러스는 올해 NT Live와 ITA Live 아카이브를 엄선했고,
4월 세 편의 화제작을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선보인다.




월 17일(19:30), 20~21일(14:00) 상영되는 <플리백(Fleabag)>은 런던 출신 배우 겸 극작가 피비 월러-브리지(Phoebe Waller-Bridge), 1985~가 극본을 쓰고 연기한 동명의 1인극을 2019년 NT Live가 극장용으로 영상화한 것이다. <플리백>은 2013년 에든버러 페스티벌 연극 초연으로 출발해 2016년 BBC TV 시리즈에 맞춰 변형됐고, 2019년 NT Live는 BBC TV 시리즈를 일부 개정해 극장판으로 제작했다. 같은 해 월러-브리지는 NT Live 버전을 토대로 뉴욕 브로드웨이, 런던 웨스트엔드 윈드엄 극장 오프라인 투어를 진행했고 동 연극 상연을 종연했다. 2020년 코로나19 기간 아마존 프라임이 일시 온라인 유료 다운로드를 진행한 경우를 빼면, 현재 <플리백>을 볼 유일한 경로는 국내에선 엔톡 라이브 플러스뿐이다.


‘지저분함’을 뜻하는 작품명만 보면, 성에 분방한 독신 여성의 음습한 담론이 주를 이룰 듯하지만, 탄탄한 각본을 바탕으로 관객의 박장대소를 끌어내는 부분을 영상물의 편집점처럼 삼아, 다음 에피소드로 매끄럽게 전환하는 수완이 돋보인다. 웨스트엔드 스탠드업 코미디 각본 쓰기로 쌓은 노하우가 영리하게 접목됐다. 짧은 언어로 빠르게 소통하는 소셜미디어의 특징을 차용하거나, 연극물을 다루는 지상파 TV와 OTT의 경계 허물기(spillover), 공연 영상화 진전 같은, 2010년대 후반 시대상 변화를 적극 수용하면서 여성 1인극의 새 관객층을 개발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작품이다. 소극장 1인극이 전하는 친밀함을 그간 모르던 시청자가 BBC의 연극 공연 영상을 보고 웨스트엔드에 나갔다고 한다.


공연 영상화가 BBC TV 시리즈의 후속작이다 보니, NT Live 과도기 현상이 영상에 녹아 있는 점도 흥미롭다. 2016년 BBC 드라마로 작품을 경험한 관객이 2019년 영상화 객석에 앉아, TV에서 기대하던 웃음과 비슷한 상황을 기다린다. 자신은 화자의 저속한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알고 있는 데 반해, 본 영상물을 지켜보는 관객은 화자의 내러티브를 이해하기 전에 영상 속 관객의 박장대소를 먼저 대해야 하는 괴리감이 여느 NT Live 작품보다 큰 편이다. 월러-브리지의 <플리백> 공연 중단 결정도 “계속 웃겨야 한다는 압박감”이었던 점을 살피면, NT Live 제작 시 관객 선정에도 유의해야 하는 점을 본작이 알렸다.



NT Live <플리백> ⓒMatt Humphrey



NT Live <플리백> 번역가 박민섭 


전 그렇습니다. 대체로 안온한 매일 속에서 격렬하게 죽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종종 은밀하게 그만 살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어려워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갈(섹스할) 의지를 불태우는 주인공이 잘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절망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지라도요. 하지만 관객 여러분이 공감을 해도, 할 수 없어도 플리백은 상관없어할 것 같긴 합니다. 

개인적인 당부는영상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구간이 이해되지 않아도 자신의 공감 능력을 의심하지 않길 바랍니다. 저도 그랬으니까 :)



ITA Live <숨겨진 힘> ⓒJan Versweyveld



4월 18일(19:30), 20일(18:00) 상영되는 <숨겨진 힘(De stille kracht)>은 네덜란드 작가 루이 마리안 쿠페루스(Louis Marie-Anne Couperus, 1863~1923)의 1900년작 동명 소설로, 2015년 ITA 앙상블이 예술감독 이보 반 호프 연출 작품을 영상화했다. 미국과 뉴욕에서 이국 텍스트를 기반으로 국제적으로 성공한 이보 반 호프가, 고국에서 주목한 문학가는 네덜란드 문인 쿠페루스였다. 이보 반 호프는 쿠페루스의 <지나가는 것들(De Dingen Die Voorbijgaan)> <작은 영혼(Kleine Zielen)>에 이은 3부작 프로젝트로 <숨겨진 힘>을 제작했다. 네덜란드 식민지 인도네시아 자바를 작중 배경으로, 동인도제도를 관할하는 네덜란드 행정관 오토 판 아우데이크와 그 가정의 몰락을 통해 제국주의는 결국 현지 문화와 자연의 ‘숨겨진 힘’에 의해 패배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네덜란드 근대문학은 식민지 시대, 자바에서 자행된 원주민 강탈의 폭력성을 흔하게 다뤘지만, 이보 반 호프는 쿠페루스의 작중 캐릭터에서 현재성을 포착했고, 관객이 과거와 현재를 동일시하도록 시청각적 연출을 펼쳤다. 규율에 충실하지만,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은 현저히 떨어지는 오토 판 아우데이크는 자바의 근대화를 내걸었지만 현지인 마음을 사는 데 실패한 네덜란드 식민정책을 상징한다. 현지 부인 사이에 얻은 아이들의 비행, 새로 얻은 부인의 만성적 외도, 심지어 그녀와 자식의 불륜은 1900년대 자바보다는 오히려 2010년대 암스테르담이나 우리 이야기로 투과된다.


ITA 앙상블작을 ITA Live로 제작하면서, 식민 통치를 위해 자바로 들어간 네덜란드인의 안도감과 불안감이 어떻게 교차하는지 스크린을 통해 영화 관람석 시점에서 확인하는 맛이 색다르다. 하얀 벽과 나무판자 바닥으로 구성된 공간에 색깔이 변하면서 분위기가 극명하게 전환되는 순간은, 극 중 주역의 표변하는 심리를 반영한다. 열대우림기후의 후끈한 증기가 제국주의자의 옷뿐만 아니라 도덕관을 서서히 잠식하면서 극이 파국으로 치닫는다. 시종일관 피아노와 퍼커션 위주의 서양 클래식 음악으로 분위기가 무르익던 하리 더빗의 작품이  자바 계열의 현지 음악으로 변형되면서, 클래식으로 대표되는 서양 질서도 결국 자연의 ‘숨겨진 힘’ 앞에 흐려진다.



ITA Live <숨겨진 힘> 번역가 김은아 


작품 이해를 위한 몇 가지 정보를 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작품에 등장하는 아디닝랏 가문은 원래 마두라섬의 술탄입니다. 

장남이 라부왕이 태수, 차남이 응아지와 태수를 맡고 있는데, 극 중에선 1인 2역으로 연기합니다. 

여기서 라부왕이의 실제 모델은 자바섬 동부의 파수루안입니다. 원작자 쿠페루스의 매형이 지사로 일했던 지역이죠. 

당시 가장 중요한 플랜테이션 작물이 커피와 설탕이었는데, 극 중에서도 팟자람에 드뤼스 집안의 설탕 공장이 있습니다. 

극 후반부에 등장하는 노래 ‘네덜란드의 피’는 1815년부터 1932년까지 불리던 네덜란드 국가입니다. 

극 전체의 음악을 작곡한 하리 더빗이 무대 위에서 직접 연주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한 노음악가의 열연에도 주목해 주시길! 



NT Live <시련> ⓒJohan Persson



4월 19일(19:30), 21일(18:00) 상영되는 <시련(The Crucible)>은 미국 작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 1915~2005)가 1952년 탈고한 동명 희곡을 바탕으로 2015년 바비칸센터 <햄릿>으로 스타덤에 오른 린지 터너 연출의 2022년 올리비에 극장 버전을 NT Live로 영상화한 것이다. 밀러는 17세기 후반 매사추세츠 세일럼에서 벌어진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으로 20명의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을 바탕으로 허구화된 설정을 희곡에 부가했다. 


작가는 1950년대 미국 행정부의 매카시즘을 향한 우화로 본작을 썼고, 그동안 여러 연출가와 영화감독이 이 텍스트로 당대 관객과 호흡했다. 터너는 몰입감을 높이는 스마트한 연출로 공동체가 붕괴되는 과정을 생생히 그렸다. 성가가 울려 퍼지는 경사진 세트에 고풍스러운 청교도 복식 대신 영국 감성의 드레스를 입은 소녀들을 배치해 볼거리를 선사한다. 또한 빠른 극 전개와 눈을 즐겁게 하는 움직임으로 무거운 주제가 파생하는 지루함을 줄였다.


소녀들의 리더 아비게일 윌리엄스 역의 에린 도허티가 주도하는, 무언가를 숨기는 집단 광기가 압권이다. 청교도 신조에 눌려 육체적으로 망가진 상태에서 부르짖는 소녀들의 제창은 자신들의 거짓말로 사법 살인 직전에 처한, 실제 희생자가 겪었을 히스테리의 극치를 관객이 청각적으로 맛보라는 시위다. 소녀들이 사적 복수를 공적 영역에서 모의하는 장면은 미성년을 ‘사회적 약자’로 설정하는 관성적 도덕률에 경종을 울린다. 트럼프 집권 1기 시절, ‘탈진실’ 공방이 벌어졌고, 트럼프가 2기 집권을 노리는 상황에서, <시련>은 역사적으로 되풀이되는 ‘마녀사냥’을 환기하는 작으로 시의적절하다. 2020년대 ‘탈진실’ 국면의 반복을 지켜보는 터너의 시각이 고스란히 담겼다.



NT Live <시련>  번역가 박민섭 

시대를 관통하는 이런 작품을 만나게 되면 이처럼 걸출한 희곡을 창조해 낸 존재도 인간, 

그 찬란한 창작물의 소재가 된 참혹한 실수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존재도 인간이라는 사실에 양가적 감정이 듭니다. 

과연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마녀사냥, 매카시즘, 전체주의, 캔슬컬처 등 여러 교훈과 논쟁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지만

 저는 그냥 죄짓지 말고 살자고 하고 싶네요. 진실하게 삽시다, 아주 작은 것에도그리고 잘못은 빨리 뉘우치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돌이킬 없어지기 전에 



글. 한정호 에투알클래식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