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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호 Vol. 405

죽음의 제의를 통해 삶을 되짚다

내다 / 스페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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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무용단 <사자의 서> - 미리보기

죽음의 제의를 통해 삶을 되짚다


꽃 피는 4월, 국립무용단이 관객에게 특별한 위로를 건넨다. 

죽음을 소재로 한 신작 <사자의 서>가 70분 동안 관객에게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위로의 시간을 선사할 것이다.






이번 작품은 새로 취임한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겸 단장 김종덕의 첫 안무작으로 무용계의 큰 관심을 모은다. 김종덕이 이번 시즌에 올리는 작품 중 절반 이상이 신작에 속한다. ‘전통과 실험을 오가며 미래로 나아가는 한국 춤 미학’을 슬로건으로 내건 만큼 그는 ‘한국적’ 창작에 진심인 듯하다. 그런 그가 취임한 후 첫 번째 안무작으로 내놓는 작품이 바로 이번 신작, <사자(死者)의 서(書)>이다. 특히 국립무용단을 이끄는 리더로서 자신의 철학과 예술관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낼 것이라는 점에서 이번 작품의 의미가 깊다. 


이 작품은 티베트의 위대한 스승으로 추앙받는 파드마삼바바의 경전인 『티베트 사자의 서』에서 영감을 받아 기획한 작품이다. 이 경전은 죽음 이후, 인간이 사후 세계에서 헤매지 않고 좋은 길로 갈 수 있게 안내하는 지침서와 같기에 인간의 삶과 죽음을 이해하는 보편적 내용을 담고 있다. 현대인에게 죽음이라는 주제는 근원적이지만 동시에 권태로운 것이기도 하다. 그만큼 죽음을 한낱 흔한 주제로 치부하는 현대인에게 인간 실존의 궁극을 파고든 <사자의 서>는 도리어 도발적이고 낯선 것으로 다가온다.



파드마삼바바의 경전 

『티베트 사자의 서』란?


8세기 티베트불교의 대가 파드마삼바바가 쓴 108개의 경전 중 하나로, 14세기 까르마 링빠가 중앙 티베트 감뽀다르sGam po gdar 설산 자락에서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제는 『바르도 퇴돌』인데 줄임말에 해당한다. 여기서 ‘바르도’란 생과 사의 사이란 뜻이고 ‘퇴돌’이란 듣는 것으로 해탈한다는 뜻이다. 즉 죽음에서 다시 태어나는 사이 듣는 것만으로 영원한 해탈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총 26품 656쪽에 달하는 이 경전은 사후 세계를 경험한 라마승의 증언을 근거로 죽음과 다음 환생 사이에 머물러 있는 사자를 위한 안내서와 같다. 이것이 처음 서방세계에 알려진 것은 1827년이다.



작품의 서사와 구성을 미리 엿보자면 <사자의 서>는 망자가 저승에 이르는 49일간의 여정을 춤으로 풀어낸다. 물질적 풍요, 의학과 첨단 IT기술의 발전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각자의 삶에서 소외시켰고 심지어 누군가는 ‘죽음’을 갈망하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암울한 시대 속에서 죽음 너머의 형이상학적 세계를 신체의 생생한 움직임으로 구현하려는 시도는 어떤 의도를 품고 있을까? 종교 경전 속 사후 세계를 단순한 호기심 거리로 던져줄 리 만무하다. 작품 소개에 ‘위로’라는 말을 쓴 것으로 보아 죽음으로 현재의 삶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자 한 의지가 엿보인다. 마치 “죽음은 삶을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이자 이승과 저승을 잇는 통로와 같다. 그러니 이생의 집착과 번뇌를 벗어버리고 살아 숨 쉬는 이 순간을 충분히 즐기자”고. 죽음의 제의를 벌여놓고도 오히려 관객을 삶 쪽으로 잡아 이끄는 것이다. 


총 3장으로 구성된 망자의 여정은 ‘의식의 바다’  ‘상념의 바다’  ‘고요의 바다’로 이어진다. 각 장은 망자가 죽음을 인지한 후 과거를 회상하다가 마침내 모든 집착을 내려놓고 평온을 얻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보여준다. 무대 위 망자는 관객을 대신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서 있다. 첫 번째 장인 ‘의식의 바다’에서는 죽음을 맞이한 영혼이 자기의 죽음을 인식하고 자신과 주변 세계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을 다룬다. 이때 심판을 기다리는 망자들이 하늘에 매달려 있는 듯한 장면이 연출된다. 은은한 조명과 사운드 이펙트가 망자의 불안과 기대감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드러낸다. 동시에 무용수는 회화적 움직임으로 죽음의 순간을 아름답게 서정적으로 표현한다. 그 움직임이 바람에 나부끼는 붉은 꽃잎과 하얀 눈 위를 나는 새를 연상시킨다. 특히 생의 감각을 자극하는 붉은 꽃잎과 허무를 상징하는 듯한 하얀 눈은 삶과 죽음의 대비를 명료하고도 강렬하게 시각화한다.


이어지는 두 번째 장에서는 망자가  ‘상념의 바다’ 에서 지난 삶을 회상하며 겪는 감정의 굴곡을 다채로운 안무로 표현한다. 즉 소년기부터 청년기, 장년기에 이르기까지 망자가 사랑, 결혼, 일 등 전쟁 같은 일상을 겪으며 느낀 기쁨과 슬픔, 회한과 체념 등을 움직임으로 구현한다. 무용수들은 개별적이면서도 집단적인 동작으로 망자의 내면세계를 섬세하게 그려나간다. 이때 무용수가 각자의 기억과 감정을 독특한 몸짓과 표정으로 풀어내는 모습은 특히 보는 이의 감정을 자극한다. 즉 무용수의 몸짓이 관객의 공감을 끌어내는 만큼 관객도 간접적으로 죽음을 경험하며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될 터다. 이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겪는 감정 변화를 표현하는 움직임 하나하나는 죽음의 순간을 깊이 있게 탐구한 기획자와 안무가, 무용수의 고뇌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마지막 장인 ‘고요의 바다’에서는 사후 세계에 도착한 망자가 반복적 움직임으로 모든 집착과 욕망을 내려놓고 평화를 찾아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망자가 다다른 고요의 바다는 거대한 배를 집어삼킨 폭풍우가 사라진 후, 거짓말처럼 잠잠해진 바다를 연상케 한다. “치열한 싸움과 번뇌로 점철된 삶마저 결국 죽음과 함께 끝이 난다. 결국 삶은 죽음으로 수렴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든 것이 쥐 죽은 듯 고요해진다”는 진리를 일깨우듯이 말이다. <사자의 서>는 죽음 이후에 저승에서 새로운 삶이 이어지든 그렇지 않든, 이런 사실에 대해 무관심하다. 다만 “죽음이 지난 삶을 반추하게 할 것이니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지금의 삶에 더 충실해야겠다” 혹은 “삶을 더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다짐을 종용할 뿐이다. 작품의 끝을 향해 갈수록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점점 더 느려지고 고요한 분위기는 극에 달한다. 죽음이 단순히 생의 끝에 맞는 종말이 아니라 삶의 연장임을 암시하며 시공간을 초월한 듯한 디스토피아적 분위기 속에서 무대의 막이 내린다. 


이번 공연에는 국립무용단 전 단원이 출연한다. 그런 만큼 각 무용수의 개성이 작품의 서사를 더욱 촘촘히 채우며 이끌어갈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신선한 발상과 동시대적 주제 의식으로 전통과 현대성의 조화를 고민해 온 조용진과 최호종 등의 주역 무용수가 망자의 감정을 더욱 깊이 있게 전달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대무용 단체인 ‘모던 테이블’의 김재덕과 거문고 솔리스트 황진아가 음악감독으로 참여해 망자의 애절함과 사후 세계의 신비로움을 음악으로 극대화할 예정이다. 시공간을 초월한 디스토피아적 무대를 연출하는 일은 무대미술가 이태섭이 맡았다. 공학·예술·인문을 아우르는 감독으로 이름난 그는 야광 고무호스와 블랙 라이트를 활용해 죽음과 영혼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천장에서 바닥으로 투사되는 다양한 이미지와 영상으로 죽음 이후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이와 함께 공연팀은 의상으로 제의적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이번 의상은 전통 복식의 틀을 고수하면서도 치마의 긴 트임과 찢긴 듯한 끝자락 등의 파격을 더해 현대성과 실험적 요소를 가미했다. 


무엇보다 예술감독 김종덕은 이번 작품의 초점을 무용수의 상상력에 둠으로써 주제 의식 구현에 깊이를 더했다. 즉 무용수가 안무 의도를 이해해 각자의 내면이 녹아든 독창적 움직임을 구사할 수 있도록 모든 단원을 창작 과정에 참여시켰다. 국립무용단은 평소에도 <넥스트 스텝> 프로젝트를 통해 신진 안무가 육성과 발굴에 힘써왔다. 이번 창작 과정에서는 특별히 국립무용단 전 단원의 역량을 강화하고 한국 춤의 새로운 가능성을 다 함께 탐구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모든 단원이 무대 위에서 저마다 자신만의 이야기와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작품에 다층적 해석과 깊이를 더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사자의 서>는 전통무용이 그 기저를 이루는 호흡법에 충실하듯 동양적 모티프와 사상, 국립무용단원의 고유성을 바탕으로 ‘구상과 표현’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새로운 해석을 통한 구상력의 가능성이 아닌, 새로운 구상력을 통한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준   국립무용단의 이번 신작이 한국 무용계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길 기대해 본다.



글. 나수진  

무용이론가 및 비평가. 어린 시절부터 체득해 온 무용 언어를 예술과 철학의 언어로 기술하고자 힘쓰고 있다. 

특별히 디지털 언어의 홍수 속에서 생명력 넘치는 젊은 무용가들의 작품에 주목해 인간의 몸이 지닌 감성과 동시대성을

관객의 언어로 번역(치환/해석)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국립무용단 <사자(死者)의 서(書)>

일정 2024-04-25 ~ 2024-04-27 

시간 목·금 19:30, 토 15:00 | 장소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관람권 VIP석 7만 원, R석 5만 원, S석 3만 원, A석 2만 원 

문의 02-2280-4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