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 영화 ‘이웃집 토토로’에 나올 것 같은 디자인의 괴나리봇짐
잠자리 날개처럼 사뿐하게 흔들리는 모시 모빌, 유기농 천으로 만든 커피 필터… 즐거운 바느질에서 탄생한 그녀의 작품들은 볼 때나 사용할 때나 산뜻한 기분을 선사한다
미식가에게도, 미감이 뛰어난 사람에게도 공예가의 식탁은 특별하다. 신선한 식자재로 만들어낸 음식은 물론이고 그릇이며 담음새, 컵과 젓가락 받침대 하나까지 남다른 안목으로 고른 것들이라 계속해서 눈이 간다. 대개 그들은 음식 솜씨도 뛰어나다. 작업실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한번 만들어볼까 하고 시작한 것들이 습관이 되고 즐거움이 돼 자연스럽게 아마추어 요리사 수준이 된다.
한남동 주택가 골목에 자리한 그녀의 공방 희원의 식탁도 화사한 음식과 그릇으로 매력적이다. 호두를 포함한 견과류와 얇게 채 썬 당근을 볼이 넓은 접시에 가득 담고 그 위에 오렌지를 큼직큼직하게 썰어 곁들인 샐러드부터 식초로 간을 한 밥 위에 연어와 새싹을 올린 지라시스시까지 눈으로도, 입으로도 맛있는 음식이다.
섬유 공예가 대신 바느질 작가
바느질 공방 희원의 주인인 최희주는 섬유 공예가 대신 바느질 작가라는 호칭을 쓴다. 섬유를 재료로 하는 생활 속 물건을 만드는데 꼼지락꼼지락 손바느질로 완성하는 작품이 많기 때문이다. 한남동 작업실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의 미감과 스타일, 지향점을 알 수 있었다. 산책길에 주워 온 도토리 껍질 밑에 작은 천을 동그랗게 돌돌 말아 넣어 만든 도토리 모빌부터 옅은 색깔의 모시를 재단해 공기주머니 같은 느낌으로 만든 구름 모빌, 각종 허브를 모시 옷감 안에 넣고 바느질한 괴나리봇짐까지 귀엽고 사랑스러운 작품이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작은 아름다움’은 그녀의 작업 도구와 소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색색의 실 꾸러미는 종이꽃 모양으로 작고, 소쿠리에는 산책길에 주워 온 솔방울이며 도토리 껍데기가 가득하다. 테이블 위로는 허브 잎을 가지런히 매만져 말리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냄비 받침대며 방향 주머니를 만들 때 천 안에 넣는 용도. 허브가 들어간 살림 소품들은 사용하는 내내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다. 눈길 닿는 곳마다 놓여 있는 작은 솜씨며 마음이 어여뻐 수시로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그녀는 출판사 에디터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작가로의 전향은 자연스러웠다. 일본인 남편을 만나 일본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는데 바느질할 일이 많았다. 일본은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가방이며 이불 같은 물건을 엄마가 직접 만들어 보낸다. 솜씨가 없으면 영 난감한 일이지만 그녀는 부담스럽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바느질에 익숙한 가정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옷 짓고 수놓는 솜씨로 동네에서 유명했고 아버지는 남성복 재단사였다. 유년 시절을 돌아보면 색색의 원단과 재단대 위에서 실패와 줄자를 갖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결혼 후 일본에 왔는데 시댁 역시 바느질을 좋아했다. 특히 시어머니가 그랬다. 도쿄의 문화복장학원을 졸업해 남편이 어릴 때부터 시어머니가 손수 옷을 만들어 입히셨다. 본인 옷도 직접 만드셨는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 굽는 어깨선까지 감안해 패턴을 뜨고 재단을 했다. 그랬던 분이니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각종 소품이며 기법을 신기해하고 물어보는 며느리가 얼마나 기특하고 어여뻤을까. 시어머니는 아끼는 마음으로 갖고 있던 천이며 실패 같은 도구, 단추를 모두 며느리에게 꺼내 주었다.
2 모시와 대나무로 만든 ‘가벼운 모시가방’. 시어머니를 위한 선물로 병원도, 나들이도 편하게 다니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었다
3 연한 분홍색과 노란색 등 봄의 빛깔을 강조한 ‘봄 보자기’. 펼치면 보자기가 되고 접으면 파우치가 된다
4 도예가 옥은희 선생의 작은 합을 넣기 위해 만든 보자기. 목화솜을 대고 누벼서 제작했다
5 최은희 작가가 사랑스러운 이웃이라고 표현하는 편집가게 늬은의 전시에서 선보인 ‘여름치장 목걸이’. 구슬을 넣고 감침질로 마감했다
바느질은 마음이구나, 그렇게 만든 선물은 감동이구나
손바느질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하는 마음은 일본 친구가 선물했다.
“우리 집 애들과 비슷한 또래 아이를 키우는 엄마와 친구가 됐어요. 손재주가 좋은 친구라 바지며 원피스를 만들어 아이에게 입히는 것도 옆에서 봤지요. 그때 남편은 회사 일이 너무 바빠 새벽에 출근해 밤 11시가 돼서야 집에 돌아왔어요. 하루는 그 친구와 쇼핑센터에 가서 아이들을 놀게 했어요. 집에 돌아올 때가 되니 비가 엄청나게 내리더라고요. 주차장에 와서도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였어요. 마침 애들은 곯아떨어졌고 좀 더 있다 들어가지 싶었지요. 그렇게 차 안에 있는데 그 친구가 선물 꾸러미를 내미는 거예요. 며칠 전이 제 생일이었거든요. 꾸러미를 풀어보니 할아버지 유카타로 만든 컵 받침 2개, 손바느질로 정성 들여 만든 그 물건을 보고 그만 울어버렸어요. 타국에서 이렇게 나를 챙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고마워서. 그때 무언가를 만들어서 선물하는 것은 이렇게 감동적인 거구나 하고 느꼈어요.”
이후 본격적인 학습이 시작됐다. 보자기며 방석, 천으로 만드는 아이들 준비물에도 예전과 달리 더 깊은 눈길이 갔고 그녀는 어머니에게, 시어머니에게, 그 친구에게 손바느질과 재봉의 다양한 기법과 비결을 익히기 시작했다. 한국에 들어온 후에도 천연 염색이며 한복 짓기를 가르쳐주는 곳이 있으면 열심히 쫓아다니며 배웠다.
그렇게 만든 물건들은 단정하고 자유롭고 꼼꼼하며 사랑스럽다. 무언가와 사랑에 빠지면 이것저것 계속해서 만들게 되는데 그녀의 작업실에서 그 신나고 설레는 창작의 리듬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공방 희원에서 가장 큰 창문 위에 걸어놓은 조각보를 볼까.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전통 조각보에서는 황·청·백·적·흑의 오방색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녀는 흰색과 아이보리색의 천만 사용해 현대적 미감으로 완성했다. 하늘하늘 여린 섬유질이 고운 모시에 추포(발이 굵고 거칠게 짠 베) 원단을 중간중간 배치한 것도 눈에 띈다.
“조각보는 한복이나 이불을 짓고 남은 원단으로 만들던 물건인데 복을 비는 기원의 성격이 강하다 보니 오방색처럼 ‘확실한’ 색을 썼던 것 같아요. 저도 처음에는 오방색 원단을 연결해 작품을 만들었는데 제게는 다소 ‘센’ 느낌이 있더라고요. 집 안에 걸어두고 평상시에도 편하게 바라보고 즐길 요량으로 이런 색감을 선택했어요.”
새롭게, 현대 생활에 맞는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의지는 삼베로 만든 수세미부터 한쪽 면을 인견으로 마감한 때수건까지 다양한 물건으로 이어졌다. 가장 인기가 많은 제품 중 하나는 커피 필터. 올이 촘촘한 일본의 유기농 소창으로 목화를 재배하는 순간부터 천을 짜는 과정까지 화학약품을 일절 사용하지 않아 원두 고유의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커피 애호가 중에는 종이 필터 특유의 냄새가 커피 향에 섞이는 걸 싫어해 유기농 필터를 사용하는 이도 많다. 삼베로 만든 파우치와 순면 거즈로 만들어 부드러운 느낌이 좋은 베갯잇, 한국에서 생산한 무농약 팥으로 만든 안대로 구성한 ‘굿 슬립Good Sleep’ 세트도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상품이다.
그녀의 감각은 역시 디자인에서 빛을 발한다. 삼베로 만든 수세미는 직사각 형태인데 거친 원단에 바느질로 긴 곡선을 넣거나 산등성이를 추상적으로 표현해 컵 받침으로 사용해도 손색없다. 아이보리 색깔이 고운 커피 필터는 빨간색 실로 수를 더해 볼 때마다 기분이 좋다. 그릇의 물기나 와인 잔을 닦을 때 좋은 행주는 옅은 풀색을 주조 색으로 쓰고 끝단에만 노란색을 적용해 시각적으로도 보는 재미가 있다.
그녀의 작업실에 다녀온 지 한 달이 돼가는데 그날의 음식, 그날의 작업실 풍경을 생각하면 즐거웠던 소풍날을 추억하듯 기분이 좋아진다.
글 정성갑 월간 ‘럭셔리’와 네이버 디자인프레스에서 기자와 편집장으로 20년 가까이 일했다. 한 점 갤러리이자 콘텐츠 제작·기획사인 ‘클립clip’을 운영한다
사진 제공 최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