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미르 상세

2024년 11월호 Vol. 412

자기만의 중심, 그 남자의 사고법

맺다 / 예술가의 초상

페이스북 트위터 URL공유

국립국악관현악단 김형석

자기만의 중심, 그 남자의 사고법


서글서글한 눈매로
힘을 빼고 사람을 대하는 그의 자세는
아늑한 포옹의 힘을 품는다.



 

K-팝 걸그룹 ‘아이브’ 멤버 장원영의 긍정적 성격을 가리키는 ‘원영적 사고’를 잠시 빌려 오자. 김형석 국립국악관현악단 악장의 겸손과 조화를 중시하는 태도는 ‘형석적 사고’로 압축 가능하다. 서글서글한 눈매로 힘을 빼고 사람을 대하는 그의 자세는 아늑한 포옹의 힘을 품는다.

피리·태평소를 맡고 있는 김 악장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서른세 살에 이 단체에 들어왔다. 당시 시험을 같이 본 스물세 살이 그에게 “심사하러 왔느냐”고 물었을 정도다. 김 악장은 뒤늦은 출발에 조바심을 낼 법도 하지만, 지난 삶이 국립국악관현악단에 들어오기 위한 과정이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타자로부터 느끼는 결핍이 아닌 스스로 자족하는 충만이다.

여전히 무더웠던 9월 초 국립극장에서 만난 김 악장은 자신은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며,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 싶어 몇 번이나 포기하려고 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군대를 다녀온 뒤 전라도·경상도를 가로지르며 대학 조교를 하는 등 직장 생활을 한 그는 그런데 이미 국립국악관현악단 입단을 위한 ‘준비된 인재’였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정말 꿈의 단체였어요. 옛날부터 한 번 정도는 시험을 봐 보고 싶었죠. 열심히 준비해서 시험 치고 떨어지면 ‘국악은 그만 접는다’는 마음으로 임했죠. 100일 동안 다른 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연습실에서만 살았어요.”

김 악장의 재능과 연습이 물론 국립국악관현악단에 입단하는 데 바탕이 됐지만, 김 악장의 시험 보는 노하우도 남달랐다. 특히 초견(처음 본 악보를 연습하지 않고 연주하는 것) 시험에서 그의 노련함이 빛을 발했다. “악보 볼 시간이 2분가량 주어지거든요. 전 여유 있게 봐요. 그리고 혹시 연주가 틀리더라도 멈추지 않고 쭉 가요. 확신에 찬 자신감 있는 태도가 중요하거든요. 틀리면 대부분 멈칫하잖아요. 면접 땐 ‘직장 음악과 개인 음악이 충돌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할 건가’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직장에 들어오면 개인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답하기도 했어요. 조교 때 학생들을 지켜보면서 얻은 노하우예요. 하하.”

‘유도 소년’ 출신 김 악장은 여전히 다부진 체격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도 남산을 틈틈이 오르내리며 턱걸이를 하고 국궁(國弓)을 하며 팔의 힘을 기른다. “운동과 음악은 연관성이 있어요. 반복해서 자기 것을 만들어야 하는 점이 같죠. 거기는 기술이고 여기는 예술인데 그 기술을 하나 터득하려면 진짜 수만 번 넘어지고 깨져야 해요. 여기도 똑같아요. 그리고 예술은 그때그때 감정이 다른데, 운동도 컨디션에 따라 다르거든요. 그런 편차를 없애려면 운동이건, 예술이건 오래도록 반복해야죠.”

무반(武班)(고려·조선 시대 무관(武官)의 반열(班列)을 가리킨다) 출신 증조부를 비롯해 김 악장의 집안은 대대로 운동, 몸 쓰는 일에 소질이 있었다. 김 악장도 어릴 때부터 달리기, 검도 그리고 유도에서 재능을 발견했다. 그러다 누나 김인숙 씨의 추천으로 피리를 불게 됐다. 피리가 너무 재밌어서 운동은 자연스레 뒷전이 됐다. 김 악장의 누나는 작곡가 겸 지휘자인 박범훈 전 중앙대학교 총장이 창단한 중앙국악관현악단의 거문고 수석을 지낸 연주자다. 




그렇게 음악의 꿈을 품게 된 ‘청년 김형석’은 1995년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창단한 해에 이 단체의 공연을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박범훈이 창단과 함께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았다. “박범훈 선생님은 창작 음악을 하시는데도 전통에 가장 가까운 느낌을 내는 드문 분이셨어요. 게다가 이전 창작물에 비해 사람의 감정을 건드려 주는 음악이었죠. 그때부터 전 국악관현악단에 들어간다면 무조건 ‘국립국악관현악단’이라고 마음먹었죠.”

사실 음색이 튀는 데다 단선율만 가능해 앙상블이 쉽지 않은 악기가 피리다. 그럼에도 김 악장은 다른 악기들과 잘 어우러지는 묘를 발휘한다. “관현악은 솔리스트가 아니거든요. 한 명이 튀면 그때부터 망치는 거예요. 솔로 파트에서만 잘하면 됩니다. 앙상블이라는 건 음악을 같이 들으면서 그 톤이나 세기까지 같이 맞추는 거니까요.”

김 악장이 더 특기할 만한 이유는 국립국악관현악단 일을 허투루 하지 않으면서도 예술 세계를 넓혀 나가기 위한 개인 작업도 꾸준히 병행한다는 것이다.

황해도 무형유산 최영장군당굿 이수자이기도 한 김 악장은 과거에 <김형석의 굿 이야기1 황해도 굿 ‘만신 홍세영’>을 제작, 연출하기도 했다. “만신들은 원래 자기 이름을 안 써요. 별호를 많이 쓰죠. 만신의 진짜 이름을 내건 것은 이 사람은 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 사람도 사람’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김 악장의 삶은 또한 5년 전 특별한 사람을 만나 크게 바뀌었다. 그 특별한 사람은 바로 여행사를 운영하는 쾌활하고 적극적인 아내다. 지인에게 소개를 받고 만나다 연인으로 발전했는데, 백년가약을 맺은 뒤 모든 생활에 변화가 찾아왔다.

“제가 되게 산만하고 다혈질이에요. 그래서 맨날 출근하기 전에 아내가 이렇게 얘기해요. 화내지 말고 단원들하고 사이좋게 지내라고요. 그리고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면 명상을 시켜 줘요. 그리고 책을 읽어 주고요. 그러면서 순해졌어요.” 이런 아내의 내조는 김 악장이 리더십을 발휘하며 악장 역할을 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

망가졌던 몸도 아내와 함께 필라테스, 산행을 하면서 정상으로 돌아왔다. “저는 맨날 술 마시고 사람들하고 어울려 다녔어요. 그런데 아내는 정적이에요. 앉아서 수행하고 명상하는 걸 좋아하죠. 아내를 따라다니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차분해졌어요. 아내가 클래식 음악을 잘 아는데, 제 공연이 끝날 때마다 피드백도 해 줘요. 특히 자세가 흐트러진 대목을 정확하게 짚어 줘서 저를 바짝 긴장하게 만듭니다.”

김 악장은 앞으로도 다재다능한 행보를 계속 이어 갈 계획이다. 공연 연출에도 일가견이 있는 그는 굿 음악 공연도 계속 제작해 나가고 싶다고 했다. 국립국악관현악단에서 퇴임하면, 연주자보다는 다른 영역으로 폭넓게 예술 세계를 펼쳐 나가고자 한다. “잘하는 연주자가 정말 많아요. 그래도 김형석은 대한민국에 저 김형석밖에 없으니까요. 저 나름의 음악은 계속할 생각을 하고 있어요. 다른 이들이 안 하는 제작과 연출적인 것들을 생각하고 있어요. 불교, 명상 쪽과 연결도 생각해 보고 있어요.”

그럼에도 현재 최우선순위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이다. 김 악장은 어릴 때 ‘음악하는 곳’을 떠올리면, 이곳밖에 생각나지 않았다며 애정을 과시했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제 인생에서 빼놓고 얘기할 수가 없어요. 피리 연주자 김형석보다는 국립국악관현악단 김형석이라는 호칭이 더 좋아요.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없었으면 저도 없었을 거예요. 저는 나가면, 잊힐 사람이지만 이곳에서 제가 마지막까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싶어요. 내년이면 저희가 30주년이거든요. 앞으로 40주년, 50주년이 됐을 때도 당당하게 이곳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바랄 게 없죠.”



글. 이재훈 『뉴시스』 문화부 기자
사진. 전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