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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호 Vol. 412

프리뷰: 이날치 오디세이

내다 / 스페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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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이날치傳> 프리뷰

이날치 오디세이

조선 후기 가장 성행한 판소리. 그 소리판의 중심에 있던 한 소리꾼의 삶이 국립극장 무대에 펼쳐진다.
줄타기 광대에서 명창이 되기까지 그의 삶에 녹아 있는 고난과 역경 그리고 사랑은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까.




명창 이날치가 국립창극단 신작 창극 <이날치傳>의 주인공으로 되살아난다. 조선 후기 8명창 가운데 한 명인 역사 속 인물 이경숙(1820~1892)의 예명이 이날치다. 물 위를 나는 날치처럼 날쌔게 줄을 잘 탄다 하여 ‘이날치’로 불렸다던가. 판소리 기반 국내 밴드 ‘이날치’로 더욱 유명해진 이 소리꾼의 파란만장한 일대기에 상상력을 더해 그려 냈다. 실존 인물인 판소리 명창을 내세우되, 사실(팩트)과 허구(픽션)를 버무린 ‘팩션 창극’이다. 


줄타기부터 12발까지, 전통연희 종합 세트

1장부터 10장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는 파란과 곡절이 많은 이날치의 삶을 따라 연대기 형식으로 흘러간다. 머슴으로 태어나 줄광대가 되었다가, 명창의 북재비로 들어가 온갖 수모를 견디며 귀동냥으로 소리를 익혀 마침내 조선 최고의 소리광대로 올라선다는 ‘이날치 오디세이’다. 차별받고 무시당하는 세상에서 사람대접 한번 받아 보겠다며 분투하는 이날치의 인생에, 신분의 벽을 뛰어넘는 유연이와 나누는 사랑 이야기가 살짝 겹쳐진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판소리뿐만 아니라 재담과 풍물, 줄타기와 소리 배틀을 두루 맛볼 수 있는 ‘전통연희 종합 세트’에 가깝다. 첫 장면부터 관객의 심장을 쫄깃하게 하는 줄타기 묘기가 펼쳐진다. 얼음을 타듯 위태롭다 하여 줄광대를 ‘어름사니’라고도 하는데, 이날치가 소리꾼 이전에 뛰어난 어름사니였기 때문이다. 정종임 연출은 “줄광대와 고수, 소리꾼으로 이리저리 떠돈 이날치의 삶 자체가 연희적 요소와 떼어 놓고 생각하기 어렵다”라고 했다. 실제 무대에서는 ‘줄타기 신동’으로 이름을 떨친 남창동이 대역으로 나서 관객에게 아슬아슬한 묘기를 선사한다. “관객과 가장 가까운 공간에 굵고 기다란 줄을 설치해요. 그 밑엔 광대들이 모여 있을 테고요.” 정종임 연출은 “줄타기는 가까이서 봐야 감동적”이라며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장면”이라고 소개했다. 무대와 객석 사이에 줄을 설치하면서 악단은 무대 뒤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정 연출은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초연 때 고선웅 연출의 조연출을 맡았고, <패왕별희>에선 대만 출신 연출가 우싱궈의 협력 연출로 국립창극단과 인연을 맺었다. 남사당패의 12발 상모도 시선을 사로잡는데, 극본을 맡은 윤석미 작가는 “조선 후기 사당패들이 다리에서 한바탕 공연을 펼치는 장면을 그린 김홍도의 <사계풍속도병(四季風俗圖屛)>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라며 ”재담을 대사로 깔고 연희와 창극 사이에서 대본을 써 내려갔다”라고 말했다.


연출 정종임  |  극본 윤석미  |  작창 윤진철



고제 소리부터 창작 소리까지, 소리의 향연

창극 <이날치傳>에는 32곡의 노래가 나오는데, 전통 소리와 창작 소리의 비중이 반반 정도다. 특히나 춘향가·심청가·적벽가·수궁가 중에서 유명하고 핵심적인 대목을 고루 맛볼 수 있기 때문에 ‘판소리 눈대목 모음집’으로도 손색없다. 여기에 후기 8명창의 더늠을 들을 수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미덕 가운데 하나다. 더늠은 창자가 특정 소리에 자신만의 소리를 더해 부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본인이 가장 잘 부르는 특장 대목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쓰인다. ‘춘향가’의 ‘천자뒤풀이’는 김세종, ‘수궁가’ 중 ‘토끼기변’은 송우룡, ‘적벽가’ 중 ‘조자룡 활 쏘는 대목’은 박만순, ‘심청가’ 중 ‘심봉사 눈뜨는 대목’은 박유전의 더늠으로 각각 감상할 수 있다. 
작창은 국가무형유산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이자, 1998년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 명창부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윤진철 명창이 맡았다. 윤 명창은 “전통판소리 가운데 소수에게만 전승된 옛 고제 소리의 발성과 붙임새의 흔적을 잘 표현해 요즘 소리와 다른 점이 무엇인지 보여 주려 고심했다”고 했다. 
두 차례 등장하는 명창들의 ‘소리 배틀’ 장면도 놓치면 아까운 대목.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2천 냥을 내걸어 펼쳐지는 장면이 특히 흥미진진한데, 이날치와 박만순이 ‘적벽가’의 적벽화전 대목을 놓고 대결한다. 실제로 흥선대원군은 1864년 소리 축제 통인청대사습(전주대사습)을 시작하며 19세기 판소리 전성기를 끌어낸 진정한 귀명창이었다. 윤진철 명창은 “한 사람이 일정한 대목까지 부르면 다른 사람이 이를 이어받아 부르는 방식으로 배틀을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전라감영과 전주부가 숨은 고수들을 찾아내 자존심을 걸고 벌이는 ‘소리 배틀’ 장면에선 박만순과 송우룡·김세종·박유전이 등장한다. 요즘으로 치면, 전라북도와 전주시의 대표 소리꾼이 나서 벌이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윤석미 작가는 “19세기 한양의 광통교에선 중인들이 소리광대 1명씩을 천거하고, 구경꾼의 추임새와 박수 소리로 승자를 가리는 밤놀이 소리판이 성행했다”며 “그 시절에도 이렇게 놀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1800년대 중후반을 풍미한 ‘후기 8명창’의 계보도 일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날치의 스승으로 나오는 박유전은 서편제의 비조(鼻祖)로 평가받는 인물. 그의 소리는 다른 제자 정재근을 거쳐 정응민, 정권진으로 이어지며 보성소리로 정립됐다. 정권진 명창에게 소리를 배운 윤진철 명창은 이날치의 방계 제자인 셈이니, 그 인연이 자별하다. 무등산 증심사에서 소리 공부를 하던 이날치가 쑥국새, 뻐꾹새와 소리를 섞다가 정춘풍 명창과 조우하는 장면도 흥미롭다.


무대 이미지 ⓒ김대한



유연이의 사랑으로 더 유연해지는 이야기 그리고

극본은 국악과 가요, 클래식을 넘나드는 방송과 공연 대본을 써 온 윤석미 작가가 맡았다. 창극은 이번에 처음이다.
조연으로 등장하는 개다리, 어릿광대는 세도정치로 썩은 조선 사회를 익살과 독설로 난타한다. 윤 작가는 ”모차르트가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서 피가로의 입을 통해 귀족들의 위선을 비난하는 장면을 떠올리며 작품을 썼다”고 말했다. 넉살과 능청에, 해학과 풍자를 섞은 재담이 감초처럼 보태지면서 극에 재미와 활기를 불어넣는다. 
창극에서 사랑 얘기가 빠질 수 없으니, 이날치가 머슴으로 있던 유한기의 딸 유연이가 연인으로 나온다. 신분의 벽이 높아 애당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이날치와 유연이의 사랑을 하늘에 뜬 둥근달이 이어 주는데, 요즘 식으로 치면 SNS에 가까운 기능을 한다. 이날치의 생애 마지막 순간은 1892년 장성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전부다. “다른 명창들은 어디 내려가서 후학을 길렀다든지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날치에게만 그런 얘기가 없어요.” 윤 작가는 “이날치가 굴곡진 삶의 마지막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낭만적 엔딩으로 잡아 봤다”고 말했다. 

무대는 나이테와 지문 문양으로 장식된 지름 10미터 안팎의 원형으로 만든다. 주변을 둥그런 성곽으로 꾸며 소리가 밖으로 퍼지지 않도록 했다. 기와로 장식한 솟을대문, 시간을 초월하는 의미를 지닌 커다란 달이 나온다. 정 연출은 “인연과 역사의 흐름을 재현해 보자는 뜻에서 지문과 나이테를 넣었다”라며 “성곽을 뒤집으면 병풍이 되고, 뒷벽은 LED 영상으로 쏘면서 입체적 공간을 연출할 것”이라고 했다.

러닝타임은 100분 안팎으로 길지 않게 맞췄다. “극이 쉬워야 소리가 들리잖아요. 젊은 관객은 호흡이 빠른 걸 좋아하기도 하고요.” 정 연출은 “창극의 핵심인 전통판소리를 잘 녹이되, 판소리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도 무겁지 않게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했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이날치’ 밴드의 히트곡 ‘범 내려온다’는 노래를 어떤 식으로든 집어넣어야 한다는 게 제작진의 암묵적 합의였다. 여기엔 ‘조선 최고 명창 이날치’의 위상을 복원해 제대로 알리자는 취지도 깔려 있었다. 현장에서 관객이 부르는 ‘떼창’을 기대한 걸까. 우여곡절 끝에 ‘범 내려온다’는 정통 판소리의 ‘합창’ 형식으로 낙착됐다. 창극 <이날치傳>은 명창 이날치의 복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 같다.


무대 이미지 ⓒ김대한



글.임석규
『한겨레』 기자


국립창극단 <이날치傳>

일정 2024-11-14 ~ 2024-11-21 | 시간 화·수·목·금 19:30 / 토·일 15:00

장소 달오름극장 | 관람권 R석 5만 원, S석 3만5천 원, A석 2만 원 | 문의 02-2280-4114